듀나 [봄날은 간다]는 허진호 감독이 만든 두 번째 러브 스토리입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감독한 사람한테서 기대할만한 작품이죠. 작고 간결한 이야기가 극도로 절제된 속삭임을 통해 신중하게 전달되는 그런 영화말입니다.

전작처럼 줄거리 요약도 쉽습니다. 상우는 녹음기사이고 은수는 강릉 방송국의 라디오 진행자입니다. 둘은 잠시 연애를 하다가 중반쯤에 헤어집니다. 아직 은수에게 미련이 남은 상우는 그뒤로도 은수의 주변을 돌고요.

전작과 비교하면 덜 야심적이고 더 솔직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담담한 스타일과 시한부 인생이라는 멜로드라마틱한 소재의 대조를 이용해 관객들의 감정을 능숙하게 조작하는 영화였습니다. 결백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상당히 교활한 영화였어요. 하지만 [봄날은 간다]의 이야기는 그냥 작습니다. 이 영화의 스타일은 속임수 같은 것 없이 영화에 그냥 맞습니다.

파프리카 꼭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정원은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담담한 게 당연하죠. 하지만 한창 살날이 많이 남았고 깊이 사랑에 빠진 상우의 감정은 정원의 것보다 훨씬 큽니다.

듀나 맞아요. 하지만 전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했었으니 그건 반론이 되지 못한답니다. 그리고 [봄날은 간다]는 상우의 감정을 억지로 숨기거나 의식적으로 억제하려고 하지는 않아요. 단지 상우의 감정을 필요이상으로 증폭시키지 않을 뿐이죠. 영화는 모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가깝지도 않고 무심하다고 느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어느 선에서 그를 바라봅니다.

파프리카 일반적인 한국 멜로드라마들과 비교해 보면 남녀의 역학관계가 반대죠? 이 장르에서 버림받고 상처받는 쪽은 대부분 여자들이잖아요.

듀나 어디선가 기사를 읽었는데, 사람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남녀 커플이 헤어지면 남자쪽이 더 많이 상처받는다더군요. 꽤 그럴 듯한 말 같지 않아요? 멜로드라마 장르가 뭐라고 주장하건,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선 그게 맞죠. 로맨스를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여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은 인생의 질이 달린 문제니까요. 오히려 경제적인 면에 신경 쓸 필요가 적은 남자들이 절대 사랑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겠죠.

파프리카 상우의 경우는 유전적인 이유도 있는 것 같은데요? 할머니한테서 로맨틱한 기질을 물려받은 것 같지 않아요?

듀나 보면서 [젊은 날의 중얼거림]이 떠올랐답니다. 메이리의 할머니와 상우의 할머니는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같은 사람 같아요. 상우네 쪽이 조금 더 딱하지만요.

파프리카 따지고 보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궁합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커플은 많지 않을 거예요. 대부분의 경우,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깊겠죠. 둘이 그냥 편한 사이라면 그런 차이는 대단한 역학관계를 만들지 못하지만 상우처럼 심각한 성격이라면 사정은 다릅니다.

은수의 변심은 상우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앞으로 홍보 담당 사람들이 끝도 없이 써먹을 상우의 처량한 대사를 떠올려 보세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은수는 그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대전제를 위반한 것입니다. 상우에겐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나 다름 없지요.

하지만 감정은 변하기 마련이에요. 상우가 매달리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사랑에 대한 환상일지도 모르죠. 중반까지 계속 졸려하던 은수가 상우와 헤어질 쯤부터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것을 보면 은수의 감정이 상우와 같은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고요.

듀나 영화가 끝난 뒤에도 상우가 더 '성숙'해졌을 것 같지는 않군요. 마음은 쉽게 이성을 따라주지 않는 법이니까요. 단지 자기가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았겠지요. 미래가 참 암담한 애예요. 앞으로 어떻게 견뎌낼지.

파프리카 유지태는 상우 역에 딱이지 않았나요? 원래부터 상우같은 이미지로 먹고 사는 배우잖아요. 싱겁게 키만 크고 사람이 좋아서 손가락 끝으로 부려먹기 딱 좋은 타입 말이에요. 일가친척들이 등 뒤에서 '어디서 여우같은 년을 만나 잡아먹히고 말지...'하며 쑥덕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군요.

잘 캐스팅되기도 했지만 연기도 늘었어요. 적어도 [동감] 때보다는 훨씬 깊이 있어 보입니다.

듀나 배우로서 그 동안 경험도 쌓았겠지만 전 여전히 캐스팅과 연출의 승리 같군요. 그래도 유지태가 괜찮은 '백지 배우'라는 건 말해둬야겠어요. 다시 말해 연기가 자연스럽고 발성도 정확해서 존재 자체가 거슬리는 일은 없는 배우란 말이죠. 이런 안정적인 백지 상태가 유지되면 감독이 그 위에 괜찮은 연기를 쌓아올릴만한 바탕이 마련되지요. 직업배우로서 당연한 게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것도 잘 못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대충 보면 이영애와 유지태의 캐스팅은 [8월의 크리스마스]와 크게 다르지도 않아요. 유지태를 보면 자꾸 제2의 한석규 같지 않아요? 네모난 얼굴에 아나운서 같은 말투에... 이영애도 심은하처럼 한국 관객들이 좋아하는 인형처럼 안전하게 예쁜 타입이죠. 연기 대부분은 '예쁜 척'의 변주고요.

파프리카 적어도 이영애는 심은하보다 기술적으로 나은 배우이고 연기도 편안합니다. 대사 소화력도 더 낫고요.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심은하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괜찮은 배우처럼 보인 진짜 이유는 대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듀나 아, 이영애의 연기를 깎아내리려고 한 건 아니랍니다. '예쁜 척'도 중요해요.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결정적으로 이영애의 '예쁜 척'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심은하가 보여주었던 '예쁜 척'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표현 폭도 넓습니다. 배우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 그 정도의 스펙트럼을 소화할 만큼 성숙해진 게 이유라고 생각하죠. 하여간 상우를 백업으로 세워놓고 운전 연습을 하던 은수의 다채로운 표정 변화 같은 건 정말 재미있었어요.

파프리카 전작과 비교하면 유머가 상당히 늘지 않았나요? 초반에 나온 자잘한 유머들을 다 합치면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랑 거의 맞먹을 정도던데. 종종 굉장히 세련된 기교도 구사하고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사를 중간중간에 끼워넣으며 대조 효과를 내는 대사같은 것들은 너무 잘 짜여졌어요.

듀나 네, 하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싹이 보였던 것들이죠. 자잘한 일상의 요소들을 잡아서 잘 보이게 관객들 앞에 들이대는 것 말이에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유머도 뿌리는 같죠. 관객들의 반응도 비슷해요. '맞아, 나도 저랬어', '맞아, 그럴 수도 있지...'

파프리카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사진이라는 시각적 매체가 일상을 저며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면 [봄날은 간다]에서는 녹음 작업과 라디오라는 청각적 매체가 동원되고 있지요.

듀나 조금 더 깊숙히 들이밀 수도 있었던 도구였어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사진보다는 내용과의 연결성이 적어 보이거든요. 그래도 은수가 콧노래로 부르는 [사랑의 기쁨]을 상우가 녹음해 트는 장면은 인상적이었어요.

파프리카 드물게 가사 내용과 맞게 사용되었죠? 우리나라에서는 [사랑의 기쁨]이라는 제목 때문에 종종 결혼식 축가로까지 쓰여지는 곡이잖아요.

듀나 전체적으로 [봄날은 간다]는 통속적인 스토리에 비해 굉장히 야무지고 세련된 작품입니다. 도대체 빈틈이 보이지 않아요. 심지어 [봄날은 간다]라는 유행가 제목도 징그러울 정도로 지적으로 쓰였으니까요. 하긴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그런 느낌이 들긴 했죠. 빈틈 없고 세련된 것이 나쁜 건 아니지만 두 번 연속으로 이런 영화들을 보니까 조금 숨이 막히는군요. 다음 작품은 조금 여유가 있었으면 해요.

파프리카 그런 꽉 짜여진 형식 속에서 주인공의 감정이 갇혀버렸다면 문제가 되었겠지요. 하지만 이 영화의 러브 스토리는 그렇게 생기없어 보이지 않는 걸요. 전 영화를 보면서 폐소공포증에 시달리거나 하지는 않았답니다. (01/09/14)

기타등등

지금 채널 V에서 이 영화의 클립을 이용한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면]이라는 비디오가 나오는군요. 쓸만한 장면들은 대부분 노출시키고 있으니 저같으면 좀 나중에 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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