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았던 사람의 평가는 크게 두가지로 갈린다. 영화가 왜 이토록 재미없고 지루하며 막판에는 황당하기까지 한가라는 혹평과 절재와 여백, 더불어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는 영화라는 호평.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았던 필자는 처음에는 피모 영화관의 열악한 사운드때문에 경악을 해서 제대로 몰입하지 못했으나,따뜻함이 넘치는 화면과 정물화 같은 풍경들, 더불어 일상 속에서 환상성을 띄게 만드는 감독의 눈을 보는 것으로 인해 호평을 넘어서 광분했었다. 영화관에선 비록 한번으로 그쳤지만, 삶이 힘겨워질때, 희열과 환희가 가득찰때, 에소프레소보다 밍숭맹숭한 아메리카 스타일의 커피 같은 우울에 빠지고 싶을때, 그런 때 이 영활 비디오로 빌려보았다.

그런 허진호가 3년만에 '봄날은 간다'를 들고 대중 속으로 걸어왔을때 애처럼 좋아했다. 방구차로 불리우던 소독차를 본 어린아이마냥 아무 생각없이 희열과 열정에 휩싸인채 연막속을 달리고 달리는 것처럼 영화를 보았고 빠졌다. 그리고 꿈결처럼 소주 한잔에 삼겹살을 사랑하는 이 앞에 두고 마셨다. 한편으로 쓰리기도 한 영화를 보며 나는 내가 지금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는 사실 하나에 차분한 흥에 휘둘렸다. 동풍에 휘둘리며 힘겨워하는 갈대가 아니라 따뜻한 남풍에 휘둘리며 몸이 흔들리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람과 함께 공명하며 춤을 추듯, 그렇게 즐거워했다. 기꺼운 슬픔, '봄날은 간다'에는 기꺼운 슬픔이 자리 잡고 있다.

1. 이상우, 한은수

유지태의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개인적으로 유지태에게 배우라는 타이틀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의 선입견이 작용한 가장 커다란 이유는 그의 첫 영화 데뷔작인 '바이 준'을 보며 무척이나 혐오했으며, '가위'와 '동감'으로 이어지는 그의 필모그래피 속에서 그가 배우로써 한번도 제몫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은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가위'에서 그는 단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어설픈 터프연기를 남발했고 광기와 두려움에 떠는 모습은 웃음만 자아냈다. '동감'에서 많은 팬들을 얻었다지만 대체 그의 웃는 모습을 빼놓고 그가 보여준 일차적인 종잇장같은 연기가 가치가 있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것은 순진하고 세련된 허탈한 미소를 보여주는 것말고는 없어보였다. 그것도 CF에서만 말이다. 그렇지만 '봄날은 간다'에서 그는 대변신을 한다. 얼핏보기에는 이전의 연기스타일에서 변할 게 없어보이지만, 자신의 마음 아니 등장인물의 마음을 전달하는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극중 이상우 역의 유지태는 사랑에 미숙하면서 재미라곤 전혀 없는 20대 후반 녹음기사 역을 잘 소화내었다. 그는 딱 이상우였다. 라면 물끓이는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던 한은수('이영애' 분)에게 "라면에 소주 같이 먹으면 정말 맛있는데.. 저 재미있는 이야기 몰라요"라고 말한다. 이런 따뜻하고 정감어린 연기가 그의 평상시 쌓아오던 연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으나, 떠나가려는 연인에 대해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치매가 걸린 할머니에게 하는 양 "이제 그만 정신좀 차리세요!"라고 절규하는 모습에서의 그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연기였다. 물론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표정연기가 상우 역에게 딱 맞는 옷이였다면 아쉽게도 이별의 아픔을 연기하는 곳곳에서 복잡미묘한 감정을 연기하는 곳에서 비춰야했을 광분, 화라는 요소는 조금 부족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극 중에서의 유지태는 빛이 났다. 그에게 씌였던 증오와 혐오는 사라져버렸다. 그는 완전한 이상우였으며 이상우의 사랑은 곧 유지태의 사랑이였고 이상우의 슬픔은 유지태의 슬픔이였다.

이와는 반대로 이영애가 보여준 연기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의 다림이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고 이혼했으면 딱 그 모습이였을 은수의 역할을 그녀는 너무나 평면적으로 연기하고 말았다. 물론 시나리오상 사랑의 아픔을 진하게 겪는 쪽은 상우고 은수는 그 원인을 제공하는 쪽이니 그렇게 입체적일 필요가 없었겠지만 그런 것을 고려하여도 자꾸 다림 역을 맡았던 심은하가 훨 적역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아른 거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실패했다. CF에서 보여지는 해맑은 웃음으로 커버하기에는 한번의 결혼 실패, 연하의 남자와의 사랑, 더불어 이별, 다른 남자와의 만남이라는 드라마틱한 인물인 은수의 심리상태는 너무나 광범위하고 다각적이였던 것이다. 그녀는 전혀 은수답지 못했다. 단지 그녀는 이뻐보이기 위해 노력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2. 미장센, 음향, 영화를 영화답게

영화가 연극과 다른 점은 인위적 화면 조작이 거의 무제약적으로 변화무쌍하다는 점이다. 미장센(화면 배치, 화면 구성)이 뛰어난 영화는 한편의 잘 그려진 회화를 보는 데서 느껴지는 감동을 준다. 허진호는 전편에 이어서 이번 영화에서도 안정적이고 정물화 같은 화면을 잡아냈다. 이는 촬영감독 '김형구'의 몫도 크겠으나 꾸준히 같은 스타일의 화면을 고집하는 감독의 영향이 클 것이라 생각된다.

수체화 같은 색체와 일상 속에서 흔히 보여지는 지붕, 미닫이 문, 마당, 화단들을 차분한 구도로 보여주는 감독은 결코 사랑을 일상에서 동떨어진 무엇으로 만들어 내지 않는다. 외려 사랑이 삶의 한 부분이며 어찌보면 경제, 사회적인 면보다 더커다란 추동일 수 있다는 것을 자잘한 소리로 이야기한다. 화면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는 무척이나 설득력있으며 소박하고 감미롭다.

이런 미장센이 전편과 너무나 흡사하여 식상한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허진호 팬들을 위해서 그는 3년동안 갈고 닦은 새로운 카드를 빼든다. 바로 '소리'이다. 녹음기사가 주인공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독 대사가 적은 허진호 작품 속에서 이번 작품에서 대사의 여백을 채우는 것은 소리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대밭소리, 늙은 부부가 같이 부르는 정선 아라리 소리, 졸졸 흐르는 강물소리, 파도소리, 풍경소리,갈대 소리.. 소리는 대사가 없는 공간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극중 인물에게 혹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소리가 건네는 이야기는 상우와 은수가 대사, 몸짓, 표정으로 만들어낸 사랑의 부족 부분을 채운다.

영화를 흔히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모든 예술적 장르들의 효과를 집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장르이기때문에 그렇게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그런 점때문에 아직 영화만의 문법이 서지는 않았다고도 지적한다. 허진호의 이번 영화에서 그는 영화가 가지는 특성이 무엇이어야하는가의 질문에 나름의 충실한 답변을 했다.

미장센, 음향, 그리고 상징성

3. 일상성

'봄날은 간다'는 얼핏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와 같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과 비슷해 보일지 모른다. 지극히 평범한 사랑이야기, 두드러지는 일상성, 일견 비슷해보이나 두 영화는 전혀다르다. 또 일명 홍상수영화라고 불리우는 영화들과도 다르다.

허진호가 이야기하는 이야기의 중심에서는 비슷한 소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한옥, 가족, 어머니의 부재, 노인, 사진, 죽음이 그것이다. 홍상수에서 배신, 부정, 속물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허위에 가득찬 일상을 의도적으로 잔인하게 드러내는 자연주의적 시각과 방법으로 영화의 소재로 택한 것과 다르게 그는 믿음, 신뢰, 화합, 영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특별할 것없는 비극(非劇)적인 일상을 소재로 삼는다.

그렇기에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에서 보여지는 사랑은 영원성을 체득한다. 그러므로 사실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일반적인 정의와 다르게 그의 사실주의적 묘사의 궁극적 목표는 환상성에 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 가장 일상적인 모습을 배경으로 삼아도 피어날 수 있으며 영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그는 아직 잃고 있지 않다.

4. 포기하지 않는 희망

허진호의 작품은 절대 비극을 말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 말미에는 늘 웃음으로 닫는다. 그것도 건강하고 흐뭇한 웃음으로 말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에게 내려진 가장 커다란 처형이 희망이라고 한다손 치더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그는 돈많고 화려한 생활을 하는 이에게서 삶의 진정한 모습을 찾지 않고 슬플때 라면에 소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시간 때울때 동네 친구들을 모아놓고 고스톱을 치는 사람들에게서 찾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생각을 신념처럼 가지고 하루하루를 억척스레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의 슬픔인가라고 물을때 그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힘겹고 아프고 쓰라려도 흐뭇하게 웃을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이 있기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마음이 들키면 쪽팔리고 민망하지만 그래도 좋은 것이다.

희망,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생은 그래도 살아볼만한 것이다.

ps.다들 추석 잘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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