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친구]로 한국 영화사에 깨지기 힘든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던 곽경택 감독이 새로운 콤비 유오성을 주연으로 내세운 1년만에 신작을 선보였다.

곽 감독이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 고교시절 김득구 선수의 투혼을 보고 "앞으로 영화감독이 되면 꼭 영화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던 약속을, 20년이 지난 지금 실현해 냈고 그만큼 기대가 높은 작품이다.

[챔피언]은 널리 알려진 대로 82년 미국에서 WBA 라이트급 타이틀을 놓고 레이 붐붐 맨시니와 일전을 벌였다가 숨진 비운의 복서 김득구의 일대기다.

80년대 중반 이후 지금은 세계챔피언 하나 보유하지 못할 정도로 사양길로 접어든 프로복싱을 소재로, 그것도 현재의 청소년들이나 열혈 권투팬이 아니면 알지도 못할 복서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곽-유 콤비의 시도는 맨 주먹 하나로 태평양을 건넜던 김득구 선수의
도전과도 같다는 평을 들어야 했다.

더욱이 프로 복서에게 필요한 '헝그리 정신'은 이미 부와 명예를 누린 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영화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시저스팰리스 특설 링에서 링 아나운서의 소개에 따라 관중에게 인사를 마친 두 선수가 공이 울리는 것과 함께 주먹을 교환하는 순간 카메라는 여러 각도에서 정지화면으로 이들의 모습을 잡고 타이틀 자막이 흐르면서 시작된다.

김선수의 관련 소식을 담은 신문기사가 나오고 거기에 실린 기사의 활자들이 한 글자씩 부각되며 스태프의 이름을 새기는 장면은 영화의 다큐멘터리적 특성을 부각시키면서 이야기의 내용이 단순한 사실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김선수의 영원한 혼이 살아있음을 감독은 보여주려 한다.

강원도 고성의 바닷가에서 자란 소년이 무작정 상경해 갖은 고생을 겪다가 우연히 복싱 경기 포스터를 보고 체육관의 문을 두드리는 과정은 어찌 보면 복싱 영화의 공식을 철저히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60∼70년대에는 자본 없이 몸하나만으로 돈과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직업은 프로복싱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않은가?
게다가 주인공은 유명한 천재 복서들같이 데뷔전부터 승승장구했던 선수가 아니어서 영화를 만들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4라운드 보이부터 출발해 힘겹게 한 계단씩 올라서며 정상의 꿈을 이루어나가는 김득구의 역정은 익히 알려진 영화 [록키] 시리즈와 같은 과장 없이도 극적 긴장감을 안겨주며 다양한 인종시장인 미국의 복서가 아니어서 [알리] 같은 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 없이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곽감독과 유오성은 김현치관장(윤승원 분)과 김득구 선수의 환생처럼 비극적 운명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데 성공하면서도 자칫 어둡고 무거워지기 쉬운 이야기를 멋들어지게 그려낸다.

80년대 복고풍 화면이 자아내는 흐뭇한 향수에다가 약혼녀와의 아기자기한 데이트, 국내 중량급의 간판 선수라 할 박종팔 선수 등 체육관 동료와의 훈훈한 우정 등이 겹쳐 영웅담으로 끝나기 쉬운 이야기를 웃음이 묻어나는 휴먼 드라마로 표현해 냈다.

특히 안내양(당시는 이들을 차장이라 불렀다)이 `오라잇'을 외치는 말죽거리행 버스, 띠운세가 나오는 다방 재떨이, 나이트 클럽의 허슬 춤, 석유 `곤로'에 끓여먹는 삼양라면, 줄무늬 커플 티셔츠와 `라이방' 잠자리 안경 등 지금은 볼 수 없는 소품들을 보면 곽감독과 동시대를 살았던 필자는 경외감과 내가 지금 20년전의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유오성 역시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박진감 넘치는 권투 장면과 순진한 강원도 청년의 연기를 실감나게 선보여 물오른 연기력을 보여준다.

김선수가 죽었다는 누구나 다 아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끝까지 궁금함을 갖고 영화를 지켜보고, 또 뭉클한 마음으로 극장 문을 나설 수 있는 것은 마지막 장면이 주는 메시지 때문이다.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 김선수가 남겨놓은 희망의 씨앗(당시 임신 7개월이었던 유복자)은 13년 뒤 새싹으로 자라나 텅빈 체육관에 활기를 불어넣는다는 암시.

곽경택과 유오성이 흥행이 보장되는 작품을 마다하고 열정을 바친 [챔피언]은 김득구의 도전처럼 결코 무모하지 않은 아름다운 도전으로 남을 듯 싶다.

사족하나. 김선수의 치열한 싸움을 실제로 보았던 필자는 장면 하나하나를 소홀히 넘기지 않다 보니 옥의 티가 한두개 보였다.

우선 김선수가 동양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을 때 고향 환영회에 붙은 현수막의 'WBA 동양 챔피언'이라는 표현이 잘못됐다는 점을 왜 곽 감독은 몰랐을까? WBA는 세계 타이틀이고 동양타이틀은 OPBF가 맞는 표현이다.

또하나 절친한 동료 박종팔 선수가 등장하는데 그는 미들급 선수로 김득구선수 보다 체격이 좋았는데 오히려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그려진 것은 어울리지 않는 캐스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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