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난 처음에 이 사람이 여자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1997년 <떼시스>라는 영화를 비디오가게에서 집으면서 도대체 '떼시스'가 무슨 뜻이야, 라는 생각하면서 감독이 출연도 했다는데 저 겁먹은 여자가 감독일까 상상했었다.

난 왠만한 공포영화에 거의 놀라는 법이 없는데, <떼시스>는 꽤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사실 지금은 본 지가 오래되어서 배경이 대학이었다는 것과 캠코더로 스너프를 찍는 창고가 나왔다는 것 정도 밖에 그다지 기억나는 장면이 없는데, <떼시스>는 당시 필자를 포함해서 영화를 좋아하던 사람들에게 'A Must-See Film'이었다.

<오픈 유어 아이즈>는 아메나바르가 1997년에 만든 영화이지만 국내에서는 조금 늦게 개봉하였다. 1999년이었나 이 영화를 영화제에서 처음 보았는데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한 마디로 거의 감전사했다. 스페인어로 'Abre Los Ojos'라고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 자고 일어나 거리로 뛰쳐나갔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던 장면들, 기억이 뒤죽박죽 되어버린 남자와 그의 환상의 여인 페넬로페 크루즈의 건물옥상에서의 마주침 등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오랜만에 기쁘게 생각한 영화 중 하나였다.

2. 타인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아메나바르는 4년만에 다음 작품 <디 아더스>를 발표하였다. 미국자본이 들어 있지만, 니콜 키드만과 톰 크루즈-와그너 프로덕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스페인 스탭들이다. 배경도 미국이 아닌 영국으로 20세기 초 영국의 한 섬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아메나바르라는 이름을 너무 무심하게 잊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의 두 편 모두에서 에너지와 절대감각을 느꼈으면서도 <디 아더스>에서는 단지 니콜 키드만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그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것은 거의 경악과 호흡곤란, 그리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머리 속의 상관관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뒷처리에 감탄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조금 더 과장하자면, 이 영화에는 문학으로써, 철학으로써, 연극으로써, 미술로써, 그리고 영화로써 가치있는 표현방법들이 담겨져 있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어렵지 않고 심리공포영화로써의 흥행요소 또한 갖추고 있다.

3. 산 자와 죽은 자

나는 네가 될 수 있고, 너는 내가 될 수 있으며, 죽은 자는 한 때 살았던 자이고, 산 자는 곧 죽을 자이다. 빛이 없는 사람은 빛을 받아본 적이 없거나 빛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살아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공포는 내부로부터 오고 자신을 스스로 구속하는 것 자체가 공포의 근원이다. 반전이라기보다는 너무나 그럴듯한 철학적인 뒷이야기. 내가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 사실은 나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상대성. 꼭꼭 숨어 갇혀 있을수록 그 두려움은 더욱 커져갈 것이며, 언젠가 두려움이 나를 찾게 될 것이다.

아메나바르의 이전 영화들보다 오히려 더 좁은 공간, 한정된 언어만을 사용하고 있는 이 영화는 그러나 그때문에 더 빛난다. 물론 <반지의 제왕>에서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카메라를 보다가 이 영화처럼 갇혀 있는 어두운 프레임을 접하면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 역시 두 영화의 차이점일 뿐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두 영화 모두 지금 대한민국의 한 시간대에 존재한다. 어느 면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지만, <반지의 제왕>이 대륙을 횡단하는 고속열차처럼 가파르다면, 이 영화는 어느 섬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보석처럼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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