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어떤 것도 [식스 센스]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식스 센스]는 단지 한동안 고어와 살육 속에 묻혀 있던 구식 유령 영화 장르가 현대 박스 오피스에서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입니다. [식스 센스]가 불러일으켰던 것은 구식 호러 영화의 르네상스였지, 새로운 장르나 스타일,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우린 [식스 센스]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동안 시대착오적이라는 이유로 피칠갑된 살육 장면 뒤에 가려져 있었던 구식 영화들이 슬슬 다시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런 영화를 좋아하건, 싫어하건, [식스 센스] 이후, 할리우드 호러 영화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2.

[디 아더스]도 그런 흐름을 타고 다시 등장한 구식 공포 영화들 중 하나입니다. 디멘션에서 배급하고 스너프 영화를 다룬 [떼시스]의 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작품이라니, 이름만 들으면 피투성이 칼날들이 마구 날아다니는 슬래셔 영화일 것 같은데도 말이에요.

[디 아더스]의 무대는 안개가 자욱한 저지 섬에 있는 귀신들린 대저택이고 시대배경은 1945년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그레이스는 햇볕에 심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두 아이들을 정체불명의 침입자한테서 보호해야 하지요. 영화가 계속 되는 동안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대저택은 전형적인 유령들의 습격을 받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피아노 연주가 울려퍼지고 위층에서는 흐느끼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식이지요.

우리가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작품이 철저한 장르물이라는 것입니다. [디 아더스]는 '귀신들린 집' 호러 장르에 속해 있습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경건하게 장르의 규칙을 따라갑니다. 심지어 마지막에 나오는 반전도 그렇지요. 많이들 이 반전을 [식스 센스]의 모방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런 장르의 작품들에 조금만 친숙하다면 그런 소리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식의 뒤집기를 하는 유령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으니까요. 과연 아메나바르가 깜짝쇼를 의도하기나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제 생각엔 어느 정도 포기하고 전개했을 것 같습니다. [떼시스]에서도 그랬거든요.

보다 직접적으로 모방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은 헨리 제임스의 [나사못 회전]입니다. 이 작품은 [공포의 대저택 The Innocents]이라는 제목으로 잭 클레이튼이 근사하게 영화화한 적 있으므로 영화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여간 초자연현상에 말려든 두 아이와 그들을 지키려는 여자 주인공이라는 인물 설정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심지어 세 주인공들의 역학 관계도 비슷한 걸요. 그레이스는 아이들을 지키려고 열심이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이 오히려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더 있습니다. [나사못 회전]이 그처럼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사건들이 반전도형처럼 이중적인 의미를 띄기 때문입니다. [디 아더스]는 [나사못 회전]의 반전 도형 아이디어를 가져와 영화라는 시각 매체에 맞게 변형시켜 써먹고 있습니다. 가장 분명한 부분은 끝에 진상이 밝혀지는 기본 줄거리지요. 하지만 그것 말고도 이중성과 아이러니를 이용한 효과적인 묘사는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아이들이 걸려 있는 햇빛 알레르기를 들 수 있겠군요. 이 영화에서는 어둠과 빛이 날실과 씨실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빛은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둠이 온전한 안식처를 주는 것도 아니지요. 아이들이 빛과 어둠 사이를 뛰어다니며 쫓기다 결말에 이르면 결정적인 아이러니가 그들을 맞습니다. 어두운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 아이들은 빛에 대한 공포증에서 해방되니까요.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이 왈츠를 추듯 슬쩍슬쩍 엇갈리며 빙빙 돌아가는 것입니다.

3.

[디 아더스]는 '영국 영화'를 의도하고 만든 작품입니다. 언젠가부터 '영국 영화'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 버린 듯 해요. 제임스 아이보리나 로만 폴란스키와 같은 외지인들이 태평스럽게 굉장히 영국적인 문학 각색물을 만드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아마 정작 영국인들에게는 무덤덤하게 느껴지는 그런 요소들에 외국인들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러나 이 영화는 영국 영화를 위장한 스페인 영화이기도 합니다. 배우들은 모두 영어권이지만 감독과 스텝 대부분은 스페인인이죠. 영화도 스페인에서 찍었고요. 엄격한 카톨릭 교도 엄마 그레이스의 이미지도 영국보다는 스페인쪽에 더 어울리는 듯 합니다. 얼마 전에 스페인 공식 사이트에서 스페인어로 더빙된 영화 클립을 보았는데, 그걸 보면서 아메나바르가 진짜 의도했던 대사의 음악적 뉘앙스가 그쪽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영화는 그러면서도 구식 할리우드 영화의 분위기 역시 많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들이 모방할만한 '귀신들린 집' 이야기는 대부분 할리우드에서 제작되었으니까요. 니콜 키드만의 연기도 [더 헌팅]의 줄리 해리스나 [언인바이티드]의 게일 러셀과 같이 두어도 될만큼 구식이고요.

끝도 없이 겹쳐지는 모방과 다중 국적의 베일 속에서도 아메나바르가 경쾌한 21세기 젊은이의 활기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꽤 재미있습니다. 눈에 드러나는 유령이나 괴물이 없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더 창의적이 된 것이겠지요. 그러는 동안 테크닉도 더 능숙해졌고요. [디 아더스]는 아메나바르가 만든 영화들 중 가장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입니다.

4.

니콜 키드먼은 극적인 연기와 히스테리컬한 오버 액션의 경계선을 위태롭게 오갑니다. 다행히도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게 맞죠. 영화의 복고적 분위기도 키드먼의 연기를 정당화시켜 줍니다.

알라키나 만과 제임스 벤틀리도 기가 막히게 잘 캐스팅된 아역 배우들입니다. 19세기 유럽 일러스트레이션에서 나왔을 법한 외모부터 어쩜 그렇게 딱인지요. 이들이 연기한 앤과 니콜라스의 캐릭터도 굉장히 사실적입니다. 누나와 남동생 사이의 미묘한 알력도 완벽하게 묘사되었고요.

이들의 연기를 보완해주는 배우는 버사 역의 피오눌라 플래너건입니다. 배우 자체로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지만 쉽게 어긋날 수 있는 공연자들 사이의 간격을 조절해준 공적 역시 평가 받아야 할 겁니다.

5.

[디 아더스]는 야심없는 소박한 장르 영화입니다. 언제나 자기 아이디어를 과시하고 싶어했던 아메나바르의 경향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스케일은 조금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니콜 키드먼 주연, 톰 크루즈 제작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이라는 기획을 생각해보면 이런 작은 스케일이 오히려 작품의 균형을 맞추어주는 것 같기도 하군요. 하긴 자신을 증명하려 기를 쓰는 단계를 벗어날 때가 되기는 했지요.

기타등등

아메나바르는 시체 앨범의 사진 중 하나에 카메오 출연합니다. 그레이스의 등 뒤에 숨어 있던 기분나쁜 초상화는 에두아르도 노리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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