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영화 시작시간에 늦는 바람에 인트로를 놓쳤다. 굉장히 지루하게, 이은주(A)에게로 모든 컷이 집중되는 하얗고 검은 장면들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다가 극장 문을 나서니 홍보사 직원 왈, "그래도 인트로는 멋있죠?" 아뿔싸, 내가 놓친 부분이 가장 기억할 만한 부분이었구나!

컴퓨터 그래픽이 일상화되면서 한국영화의 타이틀은 CG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쉬리>의 타이틀은 "와!"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뭐든지 반복되면 구태의연해지는 법, 계속되는 CG의 일관적인 방식의 타이틀은 너무 식상하고 또 어떤 때에는 영화의 컨셉에 맞지 않게 너무 안일하게 기획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얼핏 떠올려봐도 <재밌는 영화>, <킬러들의 수다>, <라이터를 켜라>에서 몰개성하게 '휙~'하고 떠올랐다 사라지는 메탈 느낌의 타이틀은 그다지 영화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고양이를 부탁해>처럼 감성적인 타이틀을 만나고 싶다.

<하얀방>은 <링>과 <폰>을 섞어놓은 영화다. <폰> 역시 <링>을 참고한 영화이니 엄밀히 따지면, <폰>의 인터넷 버전이다. <폰>의 인터넷 버전은 이전에도 있었다. 미국영화 <피어닷컴>이 그것인데, 인터넷 사이트를 매개로 초현실적 살인사건을 다루었지만,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하얀방>은 초현실적 살인사건에 모성본능을 접목시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두 가지를 제대로 접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 초반의 몇몇 장면에서는 과연 이렇게 미숙한 영화를 '광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으니까.

<오그>, <눈물>, <아쿠아레퀴엠> 등을 만든 한국 실험영화의 선구자 임창재 감독은 첫 장편을 만들면서 드라마투르기에 서툰 면을 보여주었다. 보도국 PD인 이은주는 '사이버경찰 25시'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경찰 정준호를 만난다. 한 살인사건의 단서가 되는 '마리 산부인과' 사이트를 취재하면서 이은주는 <양들의 침묵>의 조디 포스터처럼 용감하게 사건 속으로 뛰어들고 결국 자신이 그 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알기에 이른다.

어쩌면 <하얀방>의 아이디어는 1년 전에만 개봉했더라도 호기심을 끌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화려한 플래시 동영상이나 인터넷 사이트가 인간에게 저주를 내린다는 아이디어는 지금은 너무 일상화되어 있어서 그다지 감흥이 오지 않으니 말이다. 또, 영화가 종반부로 갈수록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사건의 중심부로 끌어 모으는데, 우리는 이미 이러한 방법을 <폰>에서 본 적이 있다. 영화를 아직 안보신 분이 계실테니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폰>에서 김유미의 남편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등장하는 것에서 이미 많이 놀랐거나 혹은 식상했던 관객들은 <하얀방>에 코웃음을 칠 것이다.

영화는 이은주, 정준호를 투 톱으로 내세웠으면서도 이들 사이에 로맨스를 집어넣지 않았다. 아마도 감독은 로맨스를 배제한 깔끔한 스릴러를 원했겠지만, 내 생각에 여기에는 농도 짙은 삼각관계가 들어갔어야만 '하얀방'의 원천인 아이의 원한과 복수에 대한 알레고리가 더 풍부하게 그려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정준호는 단지 사건의 조력자 역할에 그칠 뿐이어서 마지막 장면의 섬뜩한 아이 이미지가 '다양한 결말'을 남길 여지를 주지 못한다.

식상한 스토리, <디 아더스>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유사 분위기 조성, 이은주를 제외하고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캐릭터, 무엇보다 집중하지 못하고 아무 때나 놀래킴을 유발하기 위한 '플래쉬를 터뜨리기' 구성은 <하얀방>을 별 볼일 없는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공포영화는 무엇보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되새겨 본다. 오직 <오! 수정>과 <연애소설> 이후 폭이 넓어진 이은주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굳이 이 영화는 낙엽 떨어지는 가을에 볼 만한 영화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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