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영화계에서 사극은 한 동안 거의 죽은 장르였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어느 정도 명맥을 유지해왔지만 지난 10여년 동안 만들어진 극장용 영화들 중 정통 사극은 많지 않았죠. [영원한 제국], [무사], [취화선], [춘향뎐]과 같은 영화들이 떠오르는데, 그 중 뒤의 두편은 모두 '국민 감독' 임권택의 영화이니 당시의 유행이나 흐름과는 무관하다고 해야겠지요.

이런 현상은 유행의 변화 과정을 반영합니다. 사극은 사실적인 장르가 아닙니다. 아마 조선 시대 사람들이 [영원한 제국]을 보면 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쓰는 말이 다르고 사람들의 행동이 다르니까요. 사극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모사가 아니라 현대인이 과거를 현대의 잣대와 언어로 재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그 결과 이 장르는 시대마다 자기만의 고정된 스타일을 갖게 되는데 이게 굉장히 보수적입니다. 진짜 과거도 아니면서 정통성을 주장하며 진짜인 척 하거든요. 당연히 관객들의 입맛을 맞출만큼 '쿨'해지기도 어렵고요.

그래도 올해부터 사정이 좀 변하는 것 같습니다. 올해 여름부터 [청풍명월], [스캔들], [천년호], [낭만자객]과 같은 사극들이 연달아 쏟아져 나오거든요. 위에서 장애라고 지적한 것들은 다 어떻게 되었냐고요? 최근들어 영화계도 바뀌었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장르가 다양해졌고 국제 시장으로 진출할 가능성도 커졌고 무협 영화의 스타일이 중국와 할리우드 양쪽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유입되었으며 발전된 기술 덕택에 지금까지는 꿈도 꾸지 못했던 비주얼이 가능해졌으니까요. 이 정도면 슬슬 이 장르에 다시 도전해봐도 될 때가 된 거죠.

게다가 최근 나오는 사극들은 이전과 상당히 다릅니다. [스캔들]은 엉뚱하게도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를 번안한 작품이고 [천년호]는 신라시대를 무대로 한 판타지이며 [낭만자객]은 무협 코미디입니다. 이전에 끝도 없이 되풀이된 역사 교과서식 이야기 전개와는 거의 상관없다고 해야겠어요.

2.

[청풍명월]의 시대 배경은 인조반정 전후. 가뜩이나 안팎으로 복잡하고 위태롭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당시 역사의 디테일을 느긋하게 감상하실 생각 따위는 거두시길. 이 영화에서 인조반정은 아주 단순한 배경만 제공해줄 뿐입니다. 쿠데타로 왕이 바뀌었다. 그 때문에 친구 둘이 원수됐다.

영화의 제목 '청풍명월'은 가상의 특수 부대 이름입니다. 우리의 두 주인공 최지환과 윤규엽은 모두 그 부대 출신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입니다. 군대 모토인 청풍명월의 세상을 꿈꾸던 둘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길이 엇갈리게 됩니다. 최지환은 반정에 맞서다 실종된 뒤 나중에 자객이 되어 돌아왔고, 부하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반정에 참가한 윤규엽은 왕을 호위하고 있고요. 당연히 반정 공신들을 대상으로 한 피튀기는 연쇄 살인이 일어나고 두 친구는 한바탕 붙겠지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 영화에서 역사적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나다. 이 영화는 거의 순수한 싸나이 영화로 역사적 배경은 순전히 두 싸나이 이야기를 번갈아 들려주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런 거죠. 하나. "나는 싸나이다! 그 증거로 나는 눈물을 머금고 내 친구의 몸을 칼로 썰겠다! (쓱싹쓱싹)." 둘. "나는 싸나이다! 그 증거로 나는 내 친구를 위해 옆에 있는 사람을 칼로 썰겠다! (쓱싹쓱싹)."

이런 정서는 당연히 아시아 액션 영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나르시시즘으로 연결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오우삼의 [첩혈쌍웅]이지만요. 이 영화의 자객 최지환은 어떤 굉장한 사명감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표면적인 동기는 복수심과 대의 때문이지만 실제로 대부분 자포자기한 허무주의와 무인의 결벽증에 의해 움직이지요. 그냥 자기 멋에 쩔어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적수이자 옛 친구인 윤규엽도 성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이 친구는 자기 멋에 쩔만한 여유가 없을 뿐입니다.

역시 당연한 일이지만 여성 캐릭터는 무시됩니다. 이것 자체는 큰 문제라고 할 수 없죠. 하지만 유일한 여성 캐릭터 김시영의 존재는 거슬리는군요. 이 캐릭터는 요새 이런 종류의 영화에 자주 나오는 두 개의 스테레오타입을 결합한 것 같습니다. 날고기는 '여전사'와 맥빠진 여자 주인공이죠. 종종 저는 이 장르의 각본을 쓰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여자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3.

영화는 사실적인 액션물을 지향하고는 있지만 정말로 사실적이기만 한 액션만 그리는 건 아닙니다. 영화가 그리는 세계는 실재했던 역사적 과거의 모사와 와이어 액션이 범람하는 무협 세계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절충주의적인 방식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일단 와이어를 덜 쓴 '정통 액션' 덕택에 영화는 어느 정도 사실적인 무게를 부여받습니다. 바로 그 무게 때문에 종종 나오는 약간의 과장이 더 효과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죠. 하지만 반대로 무협 장르의 도식적인 요소들이 인조반정이라는 실제 역사적 배경과 충돌하는 동안 영화가 사실적인 힘을 잃기도 합니다.

[청풍명월]이라는 영화에서 이런 절충주의적인 접근법은 필연적인 무개성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무협과 같은 장르에는 자기만의 과장된 스타일이 있습니다. 이 장르 영화들의 매력은 바로 그 과장을 추구하는 영화적 스타일에서 나오죠. 하지만 [청풍명월]에는 그런 스타일이 거의 제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피가 튀는 극사실적인 액션만 지향하는 것도 아니고요. 운이 나쁜 몇몇 장면에서 영화는 무개성적인 사실주의 스타일로 묘사한 황당한 무협이 됩니다. 어느 한쪽을 지켰으면 도달했을 법한 액션의 클라이맥스도 찾을 수 없고요.

4.

[청풍명월]의 연기 스타일은 과도기적입니다. [무사]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는 기존의 사극이 추구했던 뻣뻣한 느낌을 지워낸, 보다 현대적이고 구어체에 가까운 대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별 힘은 없군요. 시적인 느낌도 떨어지고 디테일도 부족하며 결정적으로 그냥 흉내처럼 들립니다.

캐릭터보다는 배경으로 존재하는 조연들의 전체적인 연기 역시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연기나 대사 모두 아직 자체적인 스타일을 찾지 못한 것 같아요.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하는 건지.

주연 배우인 조재현과 최민수의 연기는 폼으로 시작해서 폼으로 끝납니다. 자기 일을 한 거죠. 싸나이들의 나르시시즘이 반을 차지하는 작품이니까요. 전 조재현 쪽이 더 나았는데, 아마 개인 취향이 어느 정도 반영되기도 했을 겁니다. 전 최민수가 어떤 연기를 하건 그 사람의 똥폼엔 심각한 부담감을 느끼니 말이에요. 조재현은 보다 미니멀하고 날씬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 캐릭터의 자아도취도 덜합니다.

5.

[청풍명월]의 가장 큰 장점은 이 작품이 성실하게 만든 장르 영화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것은 다소 무개성적일지는 몰라도 노련하게 연출된 액션신, 컴퓨터 그래픽과 세트로 정교하게 구현된 조선 시대의 모습, 자랑스럽게 제작진이 '국보급'이라고 언급했던 소품과 의상과 같은 것들입니다. 위에서 배우들에 대해 몇 마디 지적하기는 했지만 사실 다들 기술적인 면에서 큰 문제가 없으며 연출 역시 능숙합니다.

물론 전 끝도 없이 드라마와 캐릭터의 결점들을 지적할 수 있고 영화의 주제에 그렇게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제 취향의 영화는 절대로 아니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의 상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겠지요.

기타등등

영화 클라이맥스 장면에 나오는 규엽의 외침은 어딘지 모르게 2프로 광고 멘트를 연상시키더군요. "우릴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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