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의 화제의 영화 #17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화양연화>를 보기 30분전, 레코드가게(음, 너무 구닥다리 표현이군. 요즘 젊은애들은 뭐라고 부르나?)를 갔다. 영화를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화양연화>의 O.S.T가 사고 싶어서. 그런데 한정판매니 뭐니, 왕가위 편집판이니 하면서 LP크기의 화보에 CD를 끼워 2만1천원에 팔고 있었다. 순간, 내가 CD를 사는 건 장삿술에 놀아나는 거나 다름없다는, 갑자기 격렬한 역겨움에 사로잡혀서 냅다 넷 킹 콜의 CD를 집어들고 사 버렸다. 물론 <화양연화>에서 부르는 곡목은 없는 걸로.

극장에 앉아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썰렁한 반응을 견디며 내내 화면을 응시하면서 떠오르는 한가지 생각. O.S.T 살걸, 내가 미쳤지, 고결한 척은, 그냥 살걸. 그리고 영화를 본지 꼭 일주일만에 나는 기어이 O.S.T를 사서 의기양양하게 양조위와 장만옥을 떠올린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왕가위 영화를 보면, O.S.T를 안 살 수 없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음에도, 괜한 호기를 부린 것이다.

감히 단언하건대, <화양연화>는 누가 뭐래도 올해 본 최고의 영화다. 무엇보다 카메라 속도가 좋았다. 그 속에는 지나간 과거의 느림, 기억의 결을 재편하여 형성된 상실과 아픔이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점프컷이라고 불러야 할 편집은 사건의 고리를 끊어놓기 보다는 외화면에서 형성된 사건을 강화시키고, 보여지는 화면과 보이지 않는 장면에 대한 관객의 상상력이 더해져 주인공들의 처지를 공감하게 한다, 고 얘기하다 보니 너무 주관적인 소견처럼 느껴진다. 왜, 대부분의 관객(평일 3시라서 그런지 30명 안팎이 옹기종기 앉아 영화를 봤다)은 시시하다며 자막이 올라가자 굉장히 무서운 속도로 자리를 떴으므로.

폐일언하고, 영화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렉싱턴의 유령]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하루키는 그 소설의 첫머리에서 타인에게 공감가는 그 순간을 소설로 옮긴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남겼는데, <화양연화>를 보면서 그 공감이라는 거, 나이의 연륜이라는 거, 그게 떠올랐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양조위와 장만옥이 골목에서 서로 스쳐지나갈 때, 골목에 있는 수도 파이프관의 미세한 떨림이 카메라로 잡힌다. 바람 때문일 수도, 발자국소리의 공명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떨림으로 영화는 모든 것을 말해준다.

서서히 인생이라는 것을 먹어치우다 보니, 그런 떨림들의 순간이 많지 않음을 알게 되고, 그 떨림들이 일으키는 파장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그래서 마음을 접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장만옥이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무심한 듯 이웃집에 대해 물어보며 아무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는 그런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되는 나이에 이르러 비로소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절정기인 '화양연화'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시절이 지나가고 남은 회환과는 또 다른 감정이다.

영화는 지나온 것에 대한 단순한 추억도, 그 추억을 잊지 못하는 구질구질한 회상도, 혹은 그것을 미화시키는 어떤 것도 아니다. 영화는 이리저리 살아온 삶의 무게를 담아내고 있다. 기억은 너덜너덜해지고 닳아서 웅성거림만이 남았지만, 그 웅성거림, 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에 의해서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존재의 무거움을 각인시키며, 스스로를 유지하는 것이다. 지독히 근시안적인 삶이지만, '그것만이 내세상'인 것처럼. 그래서 삶은 슬프지만, 오히려 그래서 마음을 접을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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