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주의에 대한 고민을 동양 여배우의 매력으로 피력하다

장만옥의 이마 베프>는 지난 1999년에 열렸던 프랑스 단편영화제를 통해 우리나라에 선보인 영화다. 당시 서울 종로 코아아트 홀에서 열렸던 영화제는 세계영화사의 한 흐름을 장식했던 누벨바그 40주년을 기념한 것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들의 우수단편을 비롯해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실험단편 등 48편의 다양한 영화가 상영됐었다. 영화제의 개막작은 장-뤽 고다르의 67년작 <주말>이었으며, 폐막작이 바로 <이마 베프>였으니, 당시 40대였던 올리비에 아싸이야 감독의 영화적 명성을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올리비에 아사이야는 현재 레오스 까락스, 클레어 드니, 자크 리베트와 함께 90년대 프랑스 영화를 부흥시킨 젊은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마 베프>는 한국에서 극장 개봉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장만옥의 뱀파이어>란 제목의 비디오로 출시되었다가 <장만옥의 이마베프>로 제목이 수정되어 다시 출시되었다.

영화는 프랑스의 흑백무성영화 <이마 베프>의 리메이크 작에 캐스팅 된 동양의 여배우 장만옥이 프랑스로 건너 와서 영화를 찍게 되는 과정을 반다큐 형식으로 보여준다. 프랑스의 중견 감독 르네 비달은 자신의 신작을 뱀파이어 소재의 영화로 결정하고, <동방삼협>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 준 장만옥을 주연으로 결정한다. 장만옥의 무술연기가 마치 발레를 하듯 아름다웠다는 이유이다. 파리에 도착한 장만옥은 두꺼운 분장, 꽉 조이는 의상과 저예산 영화의 제작 분위기에 별다른 불평 없이 잘 적응해가지만, 스텝들의 동성애 고백, 영화에 대한 감독의 회의, 프랑스 영화에 대한 기자의 자조적인 불평에 당황해한다. 영화는 끝내 완성되지 못한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얘기하려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포기했기 때문이다. 장만옥은 리들리 스코트의 신작영화를 위해 헐리웃으로 떠나고 그동안 촬영됐던 <이마 베프>는 형이상학적인 미완성 필름으로 편집돼 감독도 배우도 없는 시사회를 갖게된다.

<이마 베프>는 장만옥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 같다. <첨밀밀>과 <화양연화>를 통해 꾸밈없는 아름다움으로 마치 자기 이야기를 하듯 자연스럽고 절제된 연기를 펼쳤던 장만옥. 그녀는 이 영화에서도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마치 본연의 모습 같은 조용하고 너그러운 주인공의 내·외면 세계를 보여준다. 감정 기복이 심한 프랑스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장만옥의 다소곳한 모습은 단연 두드러지며 동양인 특유의 "정중동"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영화의 중 감독인 르네 비달이 보고 반했다는 <동방삼협>에서는 어떤가?

양자경과 함께 여협 3인방으로 불리며 신비로운 무협액션을 펼쳤던 <동방삼협>. 두기봉 감독의 무협영화로 정소동의 현란한 액션신에 마술적인 SF가 가미됐던 영화에서 장만옥은 괄괄한 진칠 역을 맡아 홍콩영화 특유의 과장과 우습지 않은 코믹 연기를 능청스럽게 쏟아내는가 하면 다소 파격적인 액션신도 척척 소화해 냈다. <이마 베프>에서의 조용한 연기와 비교해 봤을 때, 달라지지 않은 점이라면 그녀의 변함 없는 미모와 긴 다리, 그리고 액션 정도? 영화 속 영화인 <이마 베프>와 가까운 캐릭터는 어쩌면 장만옥의 진칠보다는 매염방과 양자경이 연기해 낸 동동이나 심청이 더 적합해 보인다. 이처럼 전혀 비슷하지 않은 캐릭터에 그녀를 캐스팅했다는 건 그만큼 감독의 눈에 그녀의 매력이 돋보였다는 얘기. 이처럼 올리비에 아사이야의 눈에 콕 들어 <이마 베프>를 촬영했던 장만옥은 영화를 끝내고 98년 그와 결혼에 골인한다. 지난 해 이혼을 발표하기까지 촉망받는 프랑스 영화 감독과 홍콩 영화 최고 여배우의 결합은 현재 이병헌·송혜교 커플을 능가하는 '세기적인 커플'이었음이 자명한 사실이다.

영화 속 영화. <이마 베프>에 대한 표현이다. 이는 <이마 베프>가 영화 속 영화의 제목이라는 단순 사실을 넘어서서 프랑스의 영화 제작 현장을 잡아내는 카메라와 대사를 통해 영화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과 배우, 스텝과 기자는 영화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며 오늘날의 영화 시장과 프랑스 영화의 현주소를 이야기하고 있다. 장만옥을 취재하러 온 기자는 신비로운 동양의 여배우보다 헐리웃 진출에 성공한 홍콩의 영화가 더욱 관심있는 듯 하다. 발레로 안무한 듯한 오우삼 총격전을 칭찬하며 오우삼의 영화를 최고라고 극찬한다.

반면, <이마 베프>의 비판을 통해 프랑스 영화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서슴없이 퍼붓는다. 이마베프는 피도 살도 없는 관념일 뿐인데, 어떻게 사람들이 관념에 흥미를 가질 수 있냐는 것이다. 이처럼 지루한 영화가 전형적인 프랑스 영화이며, 지적인 영화가 프랑스 영화산업을 망쳤다는 것이다. 한 술 더 떠 프랑스 영화는 대중을 위하지 않는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 만족적인 영화, 즉 소수 엘리트를 위한 영화이며 바로 이 점에서 구닥다리 영화이고 대중들이 싫어하는 실패작이라고 한다. 아놀드 슈왈제네거나 장-끌로드 반담이 등장하고 쿵푸나 액션이 현란하게 펼쳐져야 대중이 관심을 갖게 되는 영화. 바로 영화 시장의 현주소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또, 마치 군대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일본 영화계와 달리, 중간 감독이 사라지며 조직이 해이해져 있는 프랑스 영화의 제작 현실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가 하면, 영화 제작의 일선에 있는 의상담당자는 베트맨 1편도 끔찍했는데, 왜 자꾸 만드는지 모르겠다며 돈으로 쳐만드는 것이라며 헐리웃의 오락 영화에 냉소를 던진다. 그리고, 본질과 허상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감독과 배우.

영화 <이마 베프>는 누벨 바그와 누벨 이마주 시대를 지나고 있는 프랑스 영화에 대한 자조적인 비판의 목소리와 작가적 고민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과연 대중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좀 더 재미있고 친절한 작가주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영화 한 편으로 답을 얻고자 할 수는 없겠지만, <이마 베프>를 통해 진지한 고민의 흔적은 살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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