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플 X]는 턱시도를 입은 007 스타일의 NSA 요원이 체코에서 임무 수행 도중 살해되면서 시작합니다. 시작부터 이죽거리는 선언인 셈이죠. 영화는 이제 이런 식의 구닥다리 수퍼 스파이의 시대는 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내놓은 대안은 무엇일까요? 그는 온갖 익스트림 스포츠에 정신이 나간 아드레날린 중독자 날건달인 잰더 케이지입니다.

영화의 계산은 유치할 정도로 간단합니다. 007의 대척점에 선 스파이를 만들어내 팔겠다는 거죠. 잰더는 어떻게든 007을 피해가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입니다. 그에겐 제임스 본드의 느물거리는 매너나 말주변 따위는 없습니다. 그는 직설적이고 거리의 규칙에 밝으며 액션 광입니다. 스파이가 된 것도 상원의원의 차를 훔쳐타고 스턴트 묘기를 하다 잡혔기 때문입니다. CIA보다 더 평판이 나쁜 조직인 NSA가 영화에 나오는 것도 잰더라는 캐릭터를 보조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더 성깔 더럽고 폭력적으로 느껴지거든요.

이야기는... 웃기지만 전형적인 본드식입니다. 애너키 99이라는 조직이 구소련의 과학자들을 모아 지구를 정복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이들한테서 정보를 캐내기 위해 프라하에 온 잰더는 두목 요르기의 여자 친구인 옐레나와 사랑에 빠지고 막판엔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 일련의 엄청난 스턴트를 벌입니다.

스토리가 이처럼 노골적으로 본드식인 이유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조적인 캐릭터가 가장 빛이 날 때는 비슷한 설정 속에 있을 때니까요. 하지만 이 이야기가 흔해빠진 본드 영화들에 비해 특별히 더 좋을 건 없군요. 각본은 스턴트를 어디에 넣을까에 대해서는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지만 악당들이나 설정을 만드는 데엔 건성입니다. 모두 60년대 스파이물의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것 같아요. 잰더 케이지라는 캐릭터를 충분히 이용한 것 같지도 않고요. 잰더의 도시 건달/스턴트 맨 이미지를 살리려면 본드물과는 조금 다른 배경이 필요하지요. 영화 중반이 느리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주인공 잰더도 어울리지 않는 첩자 노릇을 하면서 스토리 설정상 필요한 그 모든 설명 장면들을 통과하는 동안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었을 겁니다. 이 친구는 엔진 소리 요란한 기계와 함께 날고 뛰는 게 적성이니까 말이에요.

그래도 영화는 상당히 즐겁습니다. 아주 단순무식하게 즐겁지요. 영화엔 좋은 스턴트와 우직하고 직설적인 액션 장면들로 가득합니다. 중반엔 몸을 풀지 못해 안달이던 잰더는 액션신만 나오면 소원 성취라도 한 것처럼 설원과 강과 암벽을 날아다닙니다. 설정상 별 도움은 안되지만 15살 짜리 남자애들이라면 환장할 장난감들도 많고요. 애들 대리충족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아시아 아르젠토와 PG-13급 연애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빼먹어서는 안되겠지요? :-P

주연인 빈 디젤 역시 영화 자체보다 낫습니다. 주인공인 잰더 케이지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어요. 기본 설정만 존재하는 잰더 케이지의 모습에 나름대로의 느낌을 부여한 건 순전히 배우 디젤 자신의 그 반쯤은 둔한 곰같지만 은근히 효율적인 개성입니다. [피치 블랙]의 리딕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편은 아니지만 역 자체가 다르니까요.

[XXX]는 척하는 구석이 없는 솔직한 액션 영화입니다. 여러분이 2시간 동안 극장에 앉아 요란한 폭발과 폭력을 죄의식 없이 즐길만한 골빈 액션 영화를 원한다면, [XXX]는 충분히 좋은 영화입니다. 아마 이들이 캐릭터에 맞는 스토리를 찾는 노력만 한다면 요새 기획 중이라는 속편은 더 좋을 수도 있겠지요.

기타등등

1. 스턴트 맨 해리 오코너는 이 영화에서 다리 밑으로 패러 세일링 하는 장면을 찍다가 사망했습니다. 명복을.

2. 아시아 아르젠토는 떡대 빈 디젤 옆에 서니까 어쩜 그렇게 작아보이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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