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이 한창인 가운데 골방에서 한 여자와 섹스를 나누는 조원(배용준)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는 시작부터 무척 파격적이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가 혁명전야의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쓴 소설 [위험한 관계]를 19세기 조선시대로 옮겨온 이 드라마는 정절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던 유교사회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뻔뻔한 사극이다.

벼슬을 마다하고 지방에 기거하며 유유자적 여자들을 꼬시며 소일하는 배용준에게 사촌누나인 이미숙이 내기를 건다. 정절녀로 소문난 전도연의 처녀피를 가져오면, 상으로 자신과의 하룻밤을 허락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희대의 바람둥이로 소문난 배용준은 오르지 못할 나무는 없다는 자신감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제 영화는 우리가 문헌으로만 알고 있던 '남녀7세 부동석' 시대를 섹스 기만극으로 덧칠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를 감상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원작이 유명하기 때문에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관객은 다른 작품과 비교해가며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배역을 누가 맡았는지에 따라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는지에 주목하면 같은 줄거리에서도 전혀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다.

소설 [위험한 관계]는 원작이 주는 기묘한 긴장감 덕분인지 이미 여러번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졌다. 1959년에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로 유명한 로제 바딤 감독이 잔느 모로를 주연으로 영화화한 것을 시작으로 1987년에는 밀로스 포만 감독이 <발몽>으로, 이어 1988년에는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이 <위험한 관계>로 리메이크하였다. 또, 1999년에는 로저 컴블 감독이 <잔인한 의지>(한국제명 :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라는 제목으로 배경을 현대 뉴욕으로 옮겨 전혀 다른 영화로 만들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스티븐 프리어즈의 영화와 로저 컴블의 영화는 각각 키아누 리브스와 우마 써먼, 사라 미셸 겔러와 라이언 필립, 리즈 위더스푼이라는 스타를 배출하는 등용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각각의 영화에서 '발몽' 역을 맡은 배용준, 라이언 필립, 존 말코비치, 콜린 퍼스, 제라르 필립을 비교해보자. 배용준이 천진난만한 미소 속에 감추어진 뻔뻔함으로 여자들을 녹였다면 존 말코비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미셸 파이퍼를 사로잡는다. 라이언 필립이 리즈 위더스푼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코믹했다면 콜린 퍼스가 페루자 보크를 대하는 태도는 좀더 우아하다. 배경과 상황에 따라 캐릭터는 조금씩 다르지만 무엇보다 이 잔혹한 이야기가 배우들에게 강력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은 틀림 없어 보인다.

두번째 방법은 영화가 그려내는 조선시대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재용(A) 감독은 인터뷰에서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해 영화의 소품 하나까지 최대한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당대 최고의 부자들의 향연인 만큼 요즘 같으면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닐 그들의 옷차림새는 화려하고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 전도연의 은장도나 이소연의 속옷, 이미숙 머리의 비녀, 화장도구 등에서는 고풍스러운 옛 멋을 느낄 수 있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춘화도가 저렇게 그려지지 않았을까 할 법한 배용준의 그림, 음악을 감상하며 호수를 유람하는 당시 상류층의 놀이문화, 초창기 천주교의 예배의식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세번째 방법은 스토리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극에서 근엄한 표정의 인물들만 보아온 탓인지 섹스 게임에 빠져드는 조선시대 인물들이 어색하게 다가오긴 하지만, 목에 힘을 빼고 보면 마음껏 웃을 수 있다. 특히 옛 한글에 현대어를 가미한 나레이션과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는 감칠맛이 넘친다.

<스캔들>의 사실주의는 영화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민담의 영역으로 승화시킨다. 요즘 같았으면 유치한 장난 같았을 일들이 조선시대라는 이유로 코믹하게 이해되는 것은 당시 민중에서 구전되던 민담이 현대에 문학의 영역으로 취급되는 것과 닮았다. 영화는 눈물 한 방울 안나올 정도로 건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 순간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감성적이다. 감독은 사랑게임 이외의 생활상은 대부분 삭제하여 영화를 리드미컬하게 끌고 간다.

가벼운 짝짓기가 유행하고 사랑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요즘 같은 시대에 <스캔들>은 2세기 전 이 땅에도 플레이보이가 있었고, 그의 삶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노라고 선언하는 듯 도발적이다. "마음은 권에게 가 있고 몸은 조에게 가 있으면서도 시집은 유대감에게 가야하는 신세"라는 조씨부인(이미숙)의 말처럼 신분과 규율에 얽매여 부자연스럽게 보이던 당시 사람들에게도 본능적인 감정을 숨기지 못해 비밀리에 내통하는 정사들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방식은 매우 유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아프다. 남성우월주의의 사회가 여성들에게 발을 치고 얼굴을 가리게 만들었던 것은 여성들을 홀로 소유하겠다는 남성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양반으로 태어나는게 얼마나 힘든건데..." 배용준의 하인은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마치 신분과 관습의 틀에 갇혀 서로 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감독이 던지는 말처럼 들린다. <정사>와 <순애보>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소통'의 문제에 천착해온 이재용 감독에게 <스캔들>은 지금까지 영화들과 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여기에서 소통의 문제는 여인 정복에 정통한 배용준에게도 넘기 힘든 산과 같다. 그는 전도연과의 소통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사회와의 소통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이 일상 바깥에서 겪는 의사소통의 부재라는 이재용 감독의 테마는 자신만만하던 배용준의 결말을 비극으로 처리한 <스캔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잘 살아난다.


PS) 내년 SBS 드라마에서 김래원 주연으로 또한번 [위험한 관계]의 리메이크가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그가 보여줄 플레이보이의 이미지는 어떨지 기대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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