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성] 실버와 모프


내가 본 애니메이션 중에 가장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던 영화는 "은하철도 999"다. 극장에서는 볼 기회는 절대(?) 없었기에 불법복제된 CD로 보게 되었는데, 영화의 결말은 허무하면서도 극적이면서도 참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미묘한 결말이었다.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자면, 난 이런 류의 영화가 좋다. 단순한 건 사실 질색이다. ㅠㅠ (어쩌나∼)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나는 이 영화가 좋다. 은하철도 999에서 느껴지던 복잡미묘한 감동은 느낄 수 없었지만, 적어도 권선징악적인 일방적이고 보편적인 교훈을 주제로 삼는다거나 또한, 나쁜 놈은 무조건 나쁜놈이라는 식의 과거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우를 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호기심 많은 짐은 빌리 본스라는 그의 집으로 떨어진 낯선 사이보그 아저씨 때문에 보물섬이 그려진 우주지도를 갖게 되고, 델버트 아저씨와 함께 그 지도에 그려진 보물성, 그러니까 우주행성을 찾아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역시, 그들의 힘만으로 부친 듯 델버트는 배와 선장, 선원들을 고용하는데 이 때부터 내부에서의 갈등상황이 전개되는데, 짐이 맡은 역할은 실버의 심부름꾼. 영화에서 실버란 인물은 악당의 두목역이면서 정이 많아 영화의 끝부분까지 짐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다가 구하기도 하는 양성적 캐릭터로 나온다. 바로, 이 실버에게서 은하철도 999에서 메텔이 보여주는 양면적 캐릭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메텔이 원래부터 선함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면, 실버에게서 보이는 인간성은 메텔처럼 경직된 캐릭터라기보다는 좀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결국은 짐이 아니라 실버다. 이 실버의 역할을 따라가다보면 이 영화를 비교적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듯 하다. 그를 따라다니는 모프는 영화를 보는 내내 깨물어주고 싶은 귀여움으로 영화가 재미없었다 하더라도 이 모프 때문에 그나마 볼 맛이 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매력적인 캐릭터다. 실버가 좋아 무조건 따라왔다는 모프는 영화의 전체를 이끌어가는 실질적 주인공 실버와 영화의 주인공인 짐 사이를 드나들면서 조연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하지만, 모프는 머리가 좋다거나 말을 알아듣는다거나 하진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같다. 그래서, 그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이리라.

이야기야 어찌됐든간에 모든 가족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해피엔드의 결말을 맞는다. 중요한 것은 결론이 아니라, 그 결론을 만들어내는 과정인데 이 영화는 감동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일조하지 못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영화에서 실질적인 악당으로 등장하는 크루브와 짐의 싸움은 너무나 어이없게 짐의 승리로 끝나버렸고 크루브와 짐의 갈등은 표면화되어 심리적인 긴장감까지 불러일으킬 정도의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 영화는 실버의 내면적 갈등에 좀더 초점을 맞추려 하고 있지만 그 역시 관객의 긴장감까지 유도해내는 데에는 실패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가 그래도 볼만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제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의 보수적인 사상을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문제의식을 전면에 내세우려는 시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은하철도 999에서 보여주는 기계인간의 폐해가 <보물성>에서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성장을 보여준다. 이미 인간세계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첨단과학으로서의 문명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그것을 외면하고 거역하기보다는 그 안에서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실버의 힘이다. 그리고, 영화의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다. 변형체인 모프를 비롯한 영화에서 등장한 기이한 사이보그들. 그들과 어우러지는 사회란 무조건적인 병폐가 아니라 보다 더 잘 어우러진 통합과 화합의 세계인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엔딩의 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