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엑스맨 2/X2]는 전편보다 훨씬 손쉽게 출발한 영화였습니다. 일단 다소 불안하게 시작했지만 비교적 만족스러운 상업적 성과를 거둔 전편 덕택에 제작자들의 부담이 많이 줄었지요. 원작의 팬들도 배우들과 유니폼에 익숙해졌고 새로 등장하는 사람들도 그렇게까지 많은 편은 아니어서 캐스팅도 큰 문제가 아니었고요. 결정적으로 수많은 등장인물들과 설정을 소개하는 귀찮은 일들을 전편이 모두 해주어서 시간 낭비 없이 곧장 액션으로 돌진할 수 있었습니다.

[X2]의 이야기는 전편에서 그대로 이어집니다. 돌연변이의 대통령 암살 시도가 일어나자 대통령에게서 전권을 물려받은 스트라이커 장군은 이그재비어 교수의 학교를 습격합니다. 간신히 빠져나온 우리의 주인공들은 역시 비슷한 시기에 탈출한 마그니토 일행과 힘을 합쳐 전세계 돌연변이들의 운명이 달린 대전투를 치릅니다.

같은 주인공들을 내세워 이전의 포맷을 반복하는 [수퍼맨]이나 [배트맨] 시리즈의 속편들과는 달리 [X2]는 이어지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전편이 시리즈의 파일럿과 같았다면 이 영화는 같은 시리즈의 2월 스윕스 에피소드들을 묶어 재편집한 작품처럼 보입니다.

2.

이 영화의 줄거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대결 구도의 변화입니다. 전편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두 돌연변이 집단의 대결이라면 이 영화는 돌연변이를 학대하는 인간들과 돌연변이들의 대결입니다. 공통된 적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두 세력들이 힘을 합친다는 설정은 종종 가벼운 팬서비스용 스토리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공통의 적이 전면으로 등장하면서 그들의 방법론에 대한 토론이 더욱 첨예화됩니다. 게다가 그 두 세력들은 여전히 다른 노선을 걷고 있거든요.

영화는 여러 면에서 진행형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깁니다. 울버린의 자기 찾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지만 결말은 없습니다. 로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금씩 능력을 훔치고 있지만 우린 아직 그 총체적인 결과를 볼 수 없습니다. 이그재비어와 마그니토의 의견 불일치는 여전히 날카로운 긴장 상태 위에 놓여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진 그레이의 죽음 뒤에 이어지는 피닉스의 암시는 3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인물 배정도 전편과는 전혀 다릅니다. 전편은 울버린과 로그 쇼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다 앙상블 위주입니다. 전편의 주인공이었던 울버린과 로그의 역할이 줄었다면 전에는 주변에 머물렀던 바비나 진 그레이 같은 캐릭터들의 비중은 상당히 늘었지요.

3.

영화는 전편보다 훨씬 야심적입니다. 우선 전편에서 질문만 던졌던 주제를 보다 깊이 있게 다루려는 시도가 여럿 보입니다. 전편에서는 형식적으로나마 흑과 백의 위치에 서 있었던 이그재비어 교수와 랜셔의 입장은 제3자인 스트라이커의 등장으로 보다 불분명해지고 모호해졌습니다. 여전히 영화는 한쪽에 기울어 있지만 '방법론의 대립'이라는 주제는 보다 힘을 얻었습니다.

몇몇 은유들은 거의 공격적일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특히 동성애와 호모포비아에 대한 은유는 전편보다 훨씬 늘어났어요.

가장 뻔한 예가 바비가 자기 가족과 대면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동성애자 틴에이저 소년의 커밍 아웃 장면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도대체 다른 식으로 상상하기가 힘들 정도죠.

그보다는 덜 노골적이지만 더 강력한 은유는 스트라이커와 그의 돌연변이 아들 제이슨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게이 아들을 둔 극우파 가부장처럼 행동하고 있고, 그가 툭하면 내뱉는 '재활교육'이라는 단어에는 게이 재활 센터의 그림자가 깔려있습니다. 그가 자기 아들에게 한 일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히는데, 그건 정말로 그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걸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꼬리달린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경건한 크리스찬인 나이트크롤러의 아이러니컬한 이미지 역시 비슷한 식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부터는 점점 대상이 넓어집니다. 심지어 박해받는 소수자의 문제라는 고유의 주제도 넘어섭니다. 한바탕 이라크 전쟁을 겪은 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돌연변이들에게 전쟁을 선포하려는 매케나 대통령을 부시와 비교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겠죠.

4.

영화의 야심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의 주제를 넘어선 다른 부분에서도 발견됩니다. 우선 돌연변이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전편보다 더 드라마의 냄새를 풍깁니다. 울버린-진 그레이-사이클롭스의 삼각관계는 전편처럼 밀어붙이는 경향이 강하긴 하지만 선택과 포기라는 진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진 그레이의 갈등과 희생이나 나이트크롤러의 인상적인 성격 묘사, 새로 등장한 악역인 스트라이커 장군과 엑스맨들의 대결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라마와 사건 전개를 설정 속에 가두었던 전편과는 달리 이 영화는 주인공들의 자유 의지를 활짝 펼쳐놓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할 때를 기다린 것처럼요.

액션 역시 더 다양해지고 많아졌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나이트크롤러가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배경음악으로 깔고 백악관을 습격하는 장면일 것 같군요. 다소 뻔해질 수 있었던 장면이지만 흥미로운 텔레포트 묘사와 그럴싸하게 추가된 비장함 때문에 결과가 상당히 좋습니다. 울버린과 데스스트라이크의 대결도 괜찮은 편이고 (왜 울버린의 결투 상대는 늘 여자들일까요?) 파이로와 경찰들의 대결, 나이트크롤러의 로그 구출, 미스틱의 활약, 진의 마지막 희생과 같은 자잘한 장면들도 적절하게 삽입된 편입니다. 전체적으로 액션과 드라마가 더 유기적으로 결합되었어요. 그 때문에 오히려 액션의 클라이맥스가 약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요.

전편에서처럼, 이런 영화적 야심이 종종 엉뚱한 캠프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도 지적해야겠군요. 영화는 주제의 심각함과 만화책의 우스꽝스러움 사이에서 아주 위태로운 균형을 잡고 있는데, 반은 의도적이고 반은 의식은 하고 있지만 그냥 포기하고 밀어붙인 것입니다. 하긴 그 황당한 조합이 이런 만화책 각색물들의 재미겠지만요.

5.

그러나 [X2]는 여전히 어정쩡한 영화입니다. 아니 전편보다 더 어정쩡한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전편은 파일럿 영화 정도의 자기 완결성은 갖추었지만 이 영화엔 그런 것도 없거든요. 한마디로 말해 극장용 영화의 러닝타임은 영화의 야심을 담기엔 너무 짧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고 이야기도 너무 많으며 관객들이 소화해야 할 정보들도 너무 많지요. 이런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내려면 적어도 시리즈 10회 분량의 이야기가 필요해요. 정말 그랬다면 멋진 등장을 했다가 중간에 주저앉아버린 나이트크롤러도 걸맞는 대접을 받았을 거고, 진 그레이의 심리 묘사도 더 충실해졌을 것이며, 로그의 성장 과정도 지금처럼 장식처럼 딸려오지는 않았겠죠. 지금은 아무리 압축하고 줄여놔도 일반 관객들이 주인공들의 능력과 이름과 얼굴을 연결하느라 여전히 애를 먹는 수준이니 말입니다.

물론 상관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의 진짜 팬들은 이미 누가 누구인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고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으니까요. 그들은 마치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감상하는 고대 그리스 시민들처럼 이 영화를 볼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세계에 대한 알려진 이야기의 또다른 버전인 것이죠.

영화는 이런 열성팬들을 위한 숨은 정보들을 잔뜩 담고 있습니다. 거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지만 이런 팬들은 이그재비어의 학생들의 이름과 능력들을 벌써 꿰뚫어보고 있을 겁니다. 미스틱이 해킹하는 컴퓨터나 군데군데 나오는 텔레비전에서도 익숙한 이름들과 얼굴들이 튀어나올 거고요. 몇몇 복선들은 이런 팬들이 아니면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X2]의 인용이 그렇게까지 자폐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미국 만화책 독자가 아닌 저에겐 다른 인용들도 눈에 들어오거든요. 예를 들어 이그재비어를 유혹하는 제이슨이 어린 소녀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장면은 [킬, 베이비... 킬!]의 직접 인용이거나 그 영화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인용일 것입니다. 켈리 상원의원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던 미스틱이 유리코로 변신하는 장면은 [런던의 늑대인간]의 예의바른 흉내처럼 느껴지고요. 아무리 팬보이용 영화라고 해도 영화가 여전히 기존 영화사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안심되는 일입니다. 다른 동네의 다른 장르 컬트 유행까지 따라가는 건 힘든 일이거든요.

6.

[X2]의 결말은 거의 안티 클라이맥스입니다. 마지막 대결이 있고 교훈도 있지만 조금 힘이 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어요.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이야기를 완전히 맺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문제는 사전 계약에 의해 처음부터 속편이 보장되었던 전편과는 달리 이 영화의 속편 가능성이 비교적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 배우들이 다음 영화 출연 계약을 했다는 소리도 들리고 다음 편의 줄거리에 소문들도 떠돌고 있지만 이번처럼 확실한 속편을 만들만한 발판은 아직 없죠. 아마 이전의 배우들을 끌어모은다고 해도 배우들 쪽이 굉장히 양보를 해야 할 겁니다. 그 동안 휴 잭맨, 할리 베리, 이언 맥컬런과 같은 배우들은 몸값이 상당히 올랐잖아요.

그 때문에 영화의 결말이 더 불안해 보이기도 합니다. [X2]는 여전히 썩 좋은 액션 영화지만 아무리 그래도 2월 스윕스용입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의미를 얻으려면 시즌 피날레 용 에피소드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기타등등

1. 미스틱 역의 레베카 로민-스테이모스는 이 영화에서도 화장실 섹스신을 하나 배정받았죠. [팜므 파탈]의 화장실 섹스신과 어쩜 그렇게 노골적으로 비교가 되던지요.

2. 이그재비어 교수가 납치되어 이용되는 에피소드에서 피카드 선장이 보그족에게 납치되었던 [TNG]의 에피소드들이 떠오른 사람은 저뿐일까요?

3. 용병술이 조금 더 뛰어났다면 꼭 진이 죽을 필요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행기가 멀리 떨어져 있다면 텔레포터인 나이트크롤러와 진을 함께 보냈으면 되었잖아요. 로그가 착륙시키느라 고생하는 동안에도 같은 수법을 쓸 수 있었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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