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맨리그/The League of Extraordinary Gentlemen]의 원작은 [프롬 헬]의 원작자인 앨런 무어와 케빈 오닐의 동명 코믹북 시리즈죠. 내용은 다섯 명의 빅토리아 시대의 모험 소설 주인공들([드라큘라]의 미나 하커, [투명인간]의 하울리 그리핀, [솔로몬 왕의 보물]의 앨런 쿼터메인, [제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제킬/하이드, [해저 2만리]의 네모 선장)이 저스티스 리그 비슷한 걸 결성해 악의 세력과 싸운다는 것이고요. 이 굉장히 한심하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한 설정이 원작 코믹북에서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기본 설정과 캐릭터를 제외하면 원작과 영화의 내용에는 큰 공통점이 없다고 하는군요.

사실 기본설정도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원작에서는 다섯 명이지만 영화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도리언 그레이와 [톰 소여의 모험]의 톰 소여를 추가시켰죠. 도리언 그레이의 캐릭터가 등장한 이유는 영화를 보면 알 거고... 톰 소여는 제작자들이 미국인 캐릭터가 한 명 필요할 것 같아서 넣었다고 하더군요. [투명인간]의 하울리 그리핀이 그리핀의 공식을 훔친 도둑인 로드니 스키너로 바뀐 건 판권 문제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인물 비중입니다. 원작에선 미나 하커가 리더이지만 영화에서는 앨런 쿼터메인이 리더니까요.

원작은 일종의 문학적 게임 같습니다. 수많은 픽션의 캐릭터들이 모두 실존인물인 평행 우주를 만들어놓고 이들의 경로를 뒤섞어 포스트모던한 장난을 치는 거겠죠. 인터넷 팬 사이트에서 몇몇 정보를 얻었는데, 제대로 쳤다면 꽤 재미있을 것 같아요. 쿼터메인과 웰즈의 시간여행자를 러브크래프트의 세계에 던지는 것이나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를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올란도]와 연결시켜 하나의 인물로 만드는 것 따위는 무례하지만 분명 유쾌한 장난입니다. 영화에도 그런 장난의 일부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기를 이슈마엘이라고 불러달라는 노틸러스 호의 일등 항해사가 대표적인 예죠.

하지만 영화 버전 [The League of Extraordinary Gentlemen]은 액션 블록버스터 버전이다보니 이런 문학적 인용엔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입니다. 영화는 대충 [The X-Men]처럼 수퍼 히어로들을 모으는 도입부를 깔아놓고 중반 이후로는 허무맹랑한 액션을 몰아붙이는 쪽을 택합니다.

반전도 있고 음모도 있지만 영화의 스토리엔 대단한 무게가 없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얇기 그지없고 그들의 고민은 피상적이며 액션은 도식적이지요. 할리우드 여름 블록버스터치고는 특수 효과가 약하며 분장도 그렇게 설득력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특히 [LXG] 버전 헐크인 하이드는요. 시금치를 먹은 고릴라와 같은 하이드의 모습은 어떻게봐도 멋이 없고 설득력도 떨어져요.

영화에서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흠은 노골적인 황당무계함입니다. 특히 비평가들은 베네치아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액션을 헐뜯고 싶어 합니다. 이해가 가요. 노틸러스호처럼 거대한 잠수함이 베네치아의 운하로 들어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이니까요. 영화 만드는 사람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겠지요. 비평가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것뿐이지. 하긴 아무리 의도적이라고 우겨도 보는 사람들이 맘에 안든다는데 어쩌겠어요.

전 그 어처구니없는 모험은 그럭저럭 견딜만 했습니다. 제 눈에 거슬린 건 추가된 인용이었어요. 오리지널 멤버들은 괴상한 조합이긴 했어도 섞어놓으면 대충 먹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원작팬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톰 소여도 그렇게 어긋나는 캐릭터가 아니었고요. 하지만 도리언 그레이와 수퍼히어로 액션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맞지 않습니다. 아무리 미국 수퍼히어로물과 빅토리아 시대 문학적 캐릭터의 장르파괴적 결합이 목적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분위기 조절이라는 게 있죠. 게다가 결정적으로 늘어난 사람들 때문에 이야기가 대책없이 산만해졌어요. 원작의 다섯 명도 영화용으로는 많은 편이었는데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그럴싸한 부분은 작품 고유의 개성이라기보다는 이 작품이 종속되어 있는 장르의 힘이 살아나는 부분입니다. 힌두의 신상으로 장식된 노틸러스호나 악당 팬텀이 만든 구식 탱크와 같은 것들이 연출하는 스팀 펑크의 분위기 말이에요. 영화가 이런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예를 들어 이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아무런 생각없이 30년대 클래식 카의 모양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지요) 구시대의 호사스러움과 SF의 첨단 기기들이 결합된 이 시대착오적인 설정이 주는 쾌락은 상당히 강합니다.

[The League of Extraordinary Gentlemen]는 이번 여름 블록버스터 시즌의 패자입니다. 평은 형편없었고 흥행성적도 실망스러웠지요. 이유도 이해가 가요. 그렇게 성의있게 만들어진 영화도 아니고 에너지도 부족했으며 스토리도 그저그랬으니까요. 하지만 과연 이 영화가 지루하기만 한 작품이었는지요. 적어도 이 영화의 난장판은 욕하면서라도 즐길만 하지 않았나요?

기타등등

네모 선장이 인도인으로 나오는 설정은 영화가 꾸며낸 것이 아니라 앨런 무어 자신의 것입니다. [해저2만리]에서 네모 선장은 국적 불명의 인물이지만 속편인 [신비의 섬]에선 인도인 왕자라는 정체가 밝혀지니 나름대로 이치가 맞죠. 게다가 이들이 사는 세계는 캐릭터들이 모두 조금씩 변형된 평행우주니까 네모 선장이 노골적으로 인도인처럼 행세를 한다고 해서 특별히 비난할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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