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검을 훔쳐낸 용을 수련이 뒤쫓는다. 용은 날아서, 수련은 벽을 타넘으며 둘은 칠흙같은 베이징의 밤을 가른다. 그들은 멈춰서 몇 '합(合)'씩 주고 받다 달리고 다시 대결하는 '장단'을 반복하고 두근거리는 북소리의 호흡은 보는 이의 가슴까지 스며든다.

"현실적이고 많은 경험을 가진 수련은 강하고 빠르지만 날 줄은 모른다. 반면 젊고 반항적인 용은 우아하게 공중을 난다" 이안 감독은 '극적 내용'과 '영화적 스타일'에 대한 아크로바트의 개념에서 와호장룡이 출발했다고 말한다. 수련과 용의 무술 동작은 곧 그들의 감정이다. '강호'의 자유로움에 대한 욕망으로 공중부양하는 용과 그녀가 날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아끄는 수련의 몸동작은 서로에 대한 충고, 원망, 질책, 거부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고스란히 드러낸다. 수련과 용이 만들어내는 무술의 '합'은 눈에 보인다기 보다는 그들 사이의 언어로 '들린다'.

<와호장룡>에서 용과 리무바이, 용과 수련, 용과 호 사이의 무술은 그들 사이에 흐르는 사모의 감정, 질투, 풋사랑을 표현하는 몸짓으로 형태를 달리한다. <와호장룡>에서 무술 시퀸스는 곧 감정의 대립이다. 이안은 네 명의 주인공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의 결을 무술을 통해 그려내면서 그가 발견한 동양적 삶의 진리에 추상적 설명 대신 뼈와 살을 입혔다. 리무바이가 어둠속에서 홀로 검기를 뿜어내듯 무술은 허공속에 감정의 '기(氣)'를 내뿜는 것이며 빈공간에 생긴 '활기(活氣)'는 그 평정의 극한에 이르러 죽음과도 같은 정적과 맞닿는다. 그것은 심후한 내공으로도 비켜갈 수 없는 생에서 사로 가는 삶의 정해진 길이다.

스스로를 지배했던 무협의 전설속에서 이안이 찾아낸 중국 무술의 득도는 스스로의 감정을 완전히 제어하는 것이다. 감정을 다스리는 것, 그것이 중국 무술의 요체이며 스스로의 몸을 단련하면서 감정은 정갈해지고 미동조차 하지 않게 된다. 리무바이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의 경지에 이르며 완전히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의 의지로 포박한다. 그는 동시에 '활기'를 잃는다. 리무바이가 스승의 복수를 포기할 때 그가 잃은 것은 분명해진다. 감정의 활기를 숨죽이고 강호를 떠나고자 할 때 비로소 리무바이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만 청명검은 결코 그의 것일 수 없다. 리무바이의 입을 빌려 이안이 말하는 무도의 경지는 감정과 평정의 극이 서로 만나는 세계다. 리무바이와 용의 만남은 그 자체로서 수면을 디딧고 뛰어오르는 궁극끼리의 만남이다. 리무바이가 스스로 도달한 침묵의 공간을 수련에게 설명할 때 <와호장룡>도 비로소 수많은 무협영화에서 담고자 했으나 결코 잡을 수 없었던 무도의 궁극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청명검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리무바이에게 청명검은 놓아버릴 수 없는 속세의 티끌이다. 용에게 그것이 욕망이라면 수련에게는 '협(俠)'의 의무다. 호에게 청명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관계의 감정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로운 천둥벌거숭이 호와 고전적 신념인 '협'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수련은 득도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청명검은 스스로 그것을 버리는 자만이 경지에 이르는 화두다. 이안은 협으로부터 자유롭고 방종한 고독으로부터도 홀가분하기에 <와호장룡>을 득도의 경지에 밀어올릴 수 있다.

"나는 클래식 중국문화의 심장을 무술영화속에 담아내고 싶다고 은밀히 소망해 왔다" 이안감독이 <와호장룡>에서 맥을 짚어내는 중국문화의 심장은 리무바이가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라 말한 삶의 '허무'와 휘어진 대나무끝 강함과 부드러움 사이의 '활기'가 '무술'이라는 무언의 언어속에서 '합'을 이루는 것이다. 용은 그 합의 한가운데 서 있다. 용은 미처 무술의 '경지'에 이르기 전에 처음 자유를 경험한다. 호는 사막에서의 자유로움을 가르쳐 주지만 그녀가 리무바이가 서 있는 곳으로 조금씩 다가갈수록 호와 용의 사이는 멀어진다. 용은 스스로 삶에서 죽음으로, 젊음에서 노년으로 다가가고 있다. 리무바이가 이미 경험한 세계로 다가가는 용은 스스로의 욕망으로 줄달음치며 객잔의 패싸움속에서 자신이 '진정한' 청룡검의 주인이라고 외치지만 호와의 사랑속에서도 리무바이에 대한 연정속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는 존재다. 단지 수련과의 격렬한 격투속에서만 용은 스스로를 힘껏 드러낼 뿐이다.

용이 호와 대결하는 사막의 시퀸스, 그때 용은 미성숙의 단계이며 막연한 자유에의 갈망에 달뜬 상태다. 그래서 그녀의 몸짓은 호와 마찬가지로 분방하며 이해할 수 없을만큼 열정적이다. 그것은 남녀의 애무처럼 보이기도 하고 격렬한 놀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용의 '청명검'을 향한 내면의 욕망은 이제야 꿈틀대기 시작했을 뿐이다. 용이 리무바이와 대결하는 대나무숲 시퀸스, 용의 용맹함은 리무바이의 부드러움을 이기지 못한다. 사막에서와 마찬가지로 두사람의 대결은 큰 자연의 화폭속에 묻혀버리고 용은 자신의 감정을 대나무와 같이 연동시키는 리무바이앞에서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릴 뿐이다. 그녀는 리무바이에게 다가가면서 동시에 삶의 진리에 조금더 다가간다.

이안은 베이징, 사막, 대나무숲이라는 세 공간을 경유하면서 스스로 <와호장룡>을 득도의 경지로 밀어올린다. 욕망의 베이징과 허무의 사막에서 인물들은 사물속에 갇혀있거나 혹은 묻혀있다. 득도의 경지는 양쪽 모두에서 스며나는 필연적인 결핍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며 대나무숲에서 리무바이는 스스로 진정한 균형을 이루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균형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며 리무바이의 용에 대한 애정은 스스로 잃은 활기에 대한 결핍감에서 나온다. 리무바이는 수련에게 사모의 감정을 고백하지만 조용한 표국에서 그들의 대화는 대나무에 스치는 바람처럼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스스로 되찾을 수 없는 감정의 결핍을 잘 아는 리무바이는 용의 활기를 곁에 두고 싶어한다. 무협영화에서 반복되는 사부와 제자의 관습이지만 평정과 활기의 안이한 균형을 이안은 그렇게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용은 호를 남겨둔채 리무바이가 이르렀던 안개속 정적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녀는 강함으로 인해 부드러움으로 끌리며 활기의 정점에서 허무의 심연으로 몸을 날리는 존재다. 이안은 영화의 첫 장면, 리무바이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그 세계를 그렇게 화면에 담아낸다. 용은 베이징의 제도화된 공간과 사막의 거친 자유로움을 지나 대나무숲으로 몸을 숨기며 자신의 욕망이 결국 공허와 이어짐을 깨닫는다. 그 진리를 깨닫기 위해 그녀는 다른 세 인물과 '합'을 맞춰야 했고 그들의 대결은 곧 삶에 대한 철학적 '대화'였다.

무협영화은 스스로 과장의 관습을 가진다. 이안은 무협의 영웅들이 추구하는 것은 '협'이 아니라 '도(道)'이며 과장이 곧 평상의 삶속에 살아 숨쉬는 감정의 동요를 표현하는 것임을 <와호장룡>을 통해 드러낸다. 리무바이가 보여주는 검기와 내공은 세월과 함께 스스로를 다스리며 활기를 잃는 대신 평정을 얻어가는 동양적 인간관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안은 무협영화를 통해 '활(活)'과 '협(俠)'을 보여주는 대신 '도(道)'와 '정(淨)'이라는 동양 철학의 득도를 형상화했다. 주윤발이 오우삼의 '협'의 세계에서 이안의 '도'의 세계로 걸어들어갈 때 동양의 철학은 비로소 이안의 손에 의해 피와 살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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