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희의 씨네마레터 #1

실패를 극복하는 사람들..

매년 이맘때쯤이면 비슷비슷한 뉴스들을 듣게됩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한도 내에선 언제나 가장 추운 날이었던 '대입시험날'이 이상하리 만치 따뜻했던 것만 빼고는 수능전의 표정이나 끝나고 난 후의 이런저런 사연들로 넘쳐나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세상은 아무리21세기가 되었다고 해도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양새로 돌아가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한 학습지 선전에 등장하는, 시험 전에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으면, 어제 공부한 게 나왔으면...'하며 짧은 기도를 되뇌이던 학생의 바램에서부터 시험장 입구에서 요란하게 응원갈채를 보내는 부모님과 후배들의 훈훈한 모습까지.. 4년 전 제가 느꼈던 그 모든 긴장과 후련함과 조바심들로 점철된 여운들을 어느덧 미소로 떠올리고 있는 저를 발견하지요. 그리고 이제는 그리움이 되어버린 그 시간의 추억들과 함께 시험이 끝나면 예외 없이 한 두건 발생하던 힘든 소식들도 생각이 납니다.

몇 일전, 아니나 다를까 수능성적을 비관한 한 여학생이 투신자살을 했더군요. 고작 시험한번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일은 누가 보더라도 기가 막힌 일임엔 분명하지만, 우리는 분명 이맘때면 어김없이 벌어졌던 시험성적을 비관한 학생들의 자살소동을 보아왔습니다. 어린 영혼이 짊어져야 했던 지상최대의 목표가 되어버린 '대입'의 무게는 그 자신의 삶조차 짓눌러 버릴 만큼 무거웠던 걸까요? 떠나간 이들도 남겨진 이들도 단지 비뚤어져 있는 사회의 허공에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사그라질 수밖에 없는 실패라는 그림자.. 그리고 그 이름 위에 겹쳐져 투영되는 우리 삶의 모습에 또 한번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맙니다. 일말의 자살소동이 곧 사그라지면 대입을 향해 필사적으로 전력질주 할 다음 주자들 중 몇몇은 내년 이맘때, 후년의 이맘때면 어김없이 낙오자라는 딱지를 달고 보석과 같은 자신의 생을 마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인생자체의 무게가 버거워 포기하고 싶어질 정도의 힘겨움을 겪어야 합니다. 굳이 거창한 일생일대의 큰 사건에 휘말리지 않는다 해도 작은 문제들의 상대치는 그 상황에선 어김없이 그 무엇보다 우리를 괴롭게 하죠. 저 역시 크고 작은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고 때로는 가까스로, 때로는 요행 있게 그 위기들을 넘기기도 했습니다만 그 시련들이 다 지나간 후에야 넉살좋게 '아픈 만큼 성숙해 지는 거다'라고 얘기할 수 있을 뿐 막상 그 시련의 한가운데선 나를 지탱하고 있는 모든 끈들을 놓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게 기억납니다. 많은 사람들도 아마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실패를 겪은 사람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그 위기를 정리해 나가지만, 그 가운데서 받았던 상처나 좌절의 기억은 다만 현재의 상황으로 대리만족 하면서 애써 자신을 달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한번 사랑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는데 그토록 많은 갈등을 겪고, 자신의 길에 좌절을 겪은 사람은 평생을 두고 그 일에 대한 열등감을 꾹꾹 눌러 담으며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죠.

'영웅의 길을 포기한 그'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키아누 리브스 역시 실패자입니다.

왕년에 잘나갔던 쿼터백이었던 셰인 팔코는 이제는 모든 이들에게 실패자로 낙인찍힌 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초라하게 선박수리나 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하지만 그의 속에 남겨진 풋볼을 향한 열정과 못다 이룬 꿈은 영화 첫 장면에서 보여지듯이 사람들이 보지 않는 바다 속에서만 활활 타오를 뿐이었습니다. 어쨌건 그는 실패자였으니까요. 내셔널 풋볼리그를 앞두고 갑작스런 선수파업 때문에 우연치 않게 기회를 얻게된 셰인 팔코.. 실패의 기억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간직하고 있는 그가 다시 한번 무대에 선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실패를 기억하는 한 건드려질 때마다 상처는 움츠러들기 마련이니까요. 더군다나 함께 뛰게될 선수들은 농아에서부터 빚쟁이, 죄수에 이르기까지 누구하나 사회로부터 당당하게 대접을 받는 사람들은 없었으니 새로운 기회에 대한 희망도 적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대용선수들(리플레이스먼트)을 이끌어 영화를 진행시켜 나가는 과정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실패와 좌절과 그리고 그것들을 힘겹게 극복해 나가는 우리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듯 미소를 짓게 됩니다.

보통의 스포츠영화가 주는 승리의 감동과 여운은 좀더 희화화된 코미디로 이어지지만, 그들의 성장이 보여주는 과정들은 그리 가볍지 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의 시작은 실패의 고배를 기억했기에 더욱 힘들었고, 그렇기에 더욱 가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패가 무서운 것은 그 순간의 당혹스러움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계속하여 우리를 괴롭히는 또 다른 실패를 향한 두려움이겠죠. 그 두려움을 깨치고 하나되기 시작한 그들이 불렀던 'I'll survive'처럼 그들은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스스로 얻어냅니다. 나이지리아 축구선수단이 골을 먹일 때마다 춰대던 민속무용처럼 멋들어지게 춤을 추면서 말입니다. 영화가 너무 뻔하다고 많이들 얘기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승리는 자기 자신을 향한 힘겨운 시도였기에 그 안에서 저의 모습을 발견한 저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그때는 스스로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고작 몇 년 지나지 않은 지금에 돌이켜보면 별일 아니었다는 것에 새삼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많은 날들 앞에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지난 상처의 기억들은 나 스스로를 자꾸만 실패의 고통으로 겁주지만.. 그래도 저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그 상처를 이해했던 셰인 팔코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내년, 후년에는 제발 생은 힘든 만큼이나 값진 보석을 언젠가는 선물한다는 희망을 제발 수험생들이 깨달아서 소중한 삶을 포기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 새벽의 미명이 떠오르기 전이 원래 가장 어두운 법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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