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희의 씨네마레터 #2

여자, 사랑을 알고 비로소 행복을 쓰다

거장의 영화는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막연한 동경이라 할지라도 거장의 손끝에서 빚어지는 초 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그의 향기를 맛보고 싶은 소망은 언제나 제 마음 그윽한 곳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죠. 소위 말하는 어려운 영화들... 세계의 격찬 속에 전설이 되었다는 영화들... 영화의 계보를 읊어 나갈 때 빠짐없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들…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 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한번쯤은 보고 싶어지는 유혹…그것이 설령 끝도 없는 맹목적인 동경에 그칠지라도 불후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많은 영화들은 그 수용의 가능성은 별도로 하고서도, 그의 세계에 잠깐 발 담글 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주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물론 유명한 감독의 작품이다 해서 잰체하며 판에 박힌 설명을 마치 나의 감상인양 나불대는 것은 역겨운 일이지만, 그의 세계를 잠시 엿보면서 그 안에 동화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그 순간의 설레임은 분명 그 무엇보다 강한 유혹입니다.

때문에 언제나 고쳐 쓰기를 반복하는 ‘꼭 보아야 할 영화목록’에는 그렇게나 많은 영화들이 감독별로 배우별로 길게 나열되어 있는가 봅니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뻔한 목록을 보며 꼭 봐야지.. 새삼 결심을 다시 하곤 하죠. 뭐 간혹 힘들게 그런 영화를 접할 기회가 생겼다 해도, 시간에 쫓겨 아쉽게 놓칠 때가 더 많았지만 정말 운 좋게도 영화관에 들어선 순간엔 마치 소개팅 상대를 기다리는 기대 반 근심 반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자막을 기다리곤 했지요.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영화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답니다. 수능이 끝나고, 이 계획 저 계획으로 들떠있었던 겨울, 그의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을 보기위해 동숭시네마텍에 들어섰을 때의 설레임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막 영화를 찾아 다니며 보기 시작했던 당시의 마음으로서, 피터 그리너웨이라는 거장의 위대한 예술영화를 본다는 것은, 백지영의 통곡하는 기자회견 사진이 모든 스포츠일간지 전면을 채우는 것 이상으로 핫이슈였던 것입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말입니다. 어쩄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심정은 모든 해설을 동원하여 영화를 짜맞추려는 열띤 의지와 그 의지를 감당 못하는 머리의 한계 때문에 착찹하긴 했지만 ‘나도 그의 영화를 보았노라’라는 자못 순진한 자부심으로 의기양양하게 웃음지으며 영화표를 소중하게 접어 보관했던 그 설레임과 뿌듯함은 지금도 가끔 제 입가에 미소를 띄게 합니다. ‘꼭 보아야 할 영화목록’의 상단에서 언제나 제 가슴을 설레게 했던 ‘필로우 북’을 보기위해 들어서던 순간엔 그의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티켓을 들고 벅차 하던 4년 전 겨울의 추억이 새삼 뺨을 상기시켰습니다.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영화라는 이름뿐 아니라 아직은 애띤 이완 맥그리거를 볼 수 있다는 기대에 제 마음은 여지없이 흔들리고 말았죠.

영화는 1000년의 역사를 지닌 세이 쇼나곤의 필로우 북을 듣는 소녀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꽃이니 비단이니…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필로우 북은 어린 나끼꼬가 이해하기엔 조금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어린 그녀의 가슴에 글을 향한 소중한 열정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해 보입니다. 자신만의 필로우 북을 쓰겠다는 나끼꼬의 의지는 그녀의 성장과 더불어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하죠. 하지만, 그녀의 시작은 세이 쇼나곤의 필로우 북처럼 아름다운 것들만을 담아내진 못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출판업자간의 정사장면을 목격한 뒤 삐뚤어진 아버지의 대한 애정 탓인지, 혹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남편에 대한 애증때문인지.. 커다란 불과 함께 자신의 과거를 태우고 홀로서기를 시작했건만 그녀가 써내는 글은 이상하게도 부정적인 색깔들만 즐비합니다. 다만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글에 대한 열정은 그녀의 몸에 가득 씌어져, 모든 감각을 마비시킬만한 마력으로 촛불아래 흔들립니다. 꼭 자신의 몸에 깊숙히 새겨 넣겠다는 듯이...

그러던 중 그녀는 제롬을 만나게 되고,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필로우 북의 첫 장을 시작합니다. 제롬과 나끼꼬의 사랑은 감독 특유의 지극히 감각적인 화면으로 메꾸어 집니다. 갑작스런 5분할, 3분할에선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무얼 보아야 할지 난감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중국의 ‘소녀경’이나 인도의 ‘카마수트라’ 정도쯤 될 일본고서의 성체위와 겹쳐지는 둘의 은밀하고도 달콤한 꿈틀거림과 그들의 육체와 정신 위에 쉴새 없이 써내려 가는 아름다운 글들을 보며 조금씩 영글어 가는 그녀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세이 쇼나곤이 그녀의 필로우 북에서 ‘나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육체의 쾌락과 정신적 쾌락을 모두 얻었으니 행복하다’ 고백했던 사랑을 1000년이 지난 이국 땅에서 제롬의 투명한 피부위에 자신의 글을 써 내려가며 그녀는 깨달아갔던 것입니다. 그 자신의 욕망과 열정을 가득 담은 검은 먹줄기가 섬세한 붓끝을 타고 흐르듯 미끄러지며 아로 새겨지는 짜릿한 애로티시즘… 그 행복에 몸을 맡기고 마침내 자신만의 필로우 북을 시작하며 자신의 삶을 뜨겁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 연인, 유혹, 자만, 침묵, 비밀, 죽음, 삶…등에 대한 깨달음을 다른 피부들에 써 내려가며 그녀는 어린시절 들었던 세이 쇼나곤의 필로우 북을 회상합니다. 아름다운 꽃, 은밀한 키스, 남색빛깔의 모든 것, 부드러운 비단… 이렇게 무수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자신만의 필로우 북을 써내려 가면서 깨닫게 된 제롬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이해와 출판업자에 대한 용서와 그리고 자신의 품에 남겨진 제롬의 아이에 대한 넘치는 사랑과 여자로서의 자신에 삶에 대한 애정들… 이제는 그녀도 세이 쇼나곤처럼 드디어 깨닫게 된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창조물에 미소 지으며 그 이름을 적어넣었다는 말대로 붓끝을 놀려 아름다운 이름을 한자한자 써 내려가며 말입니다.

무수히 나누어진 이미지의 파편들 속에서 나끼꼬 그녀가 깨달은 삶의 넘치는 사랑을 맛보았다고 한다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요?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보다는 훨씬 이해의 고리들이 많았지만 여전히 너무나 난해한, 게다가 눈까지 어지러운 영화 속에서 제가 발견한 것이라곤 겨우 작은 사랑의 깨달음 정도지만, 그 아름다운 영상과 신선한 충격은 언제까지고 저의 목록에 남을 것 같습니다. 스치듯 지나쳐온 모든 감각과 설레임의 조각들을 동원하여 가끔 눈을 감으며 피부결을 따라 섬세하게 움직이는 붓끝을 느껴볼지도 모르겠네요. 아름다운 것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말입니다. 저도 사랑을 알면, 이제까지 깨닫지 못하던 삶의 아름다움을 미소로 적어내려 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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