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 비디오 출시

흥행도 부진하고, 별다른 이슈도 만들어내지 못했던 <순애보>와 필자의 개인적인 인연은 이재용(A) 감독의 첫 영화인 <호모 비디오쿠스>로 거슬러 올라간다(<호모 비디오쿠스>는 국내 단편 영화를 모아 출시한 「이상한 영화」에 수록되어있다). 단편영화가 있다는 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호모 비디오쿠스>를 보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였던 거 같다. 영화가 상당히 매혹적이라는 것을 알고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 이재용 감독이 보여주는 신선한 충격들은 나에겐 꽤 의미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상당히 주관적으로 치우져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설은 이쯤에서 끝내고 이제 영화 얘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서울에 사는 ‘우인’은 매일 매일을 무료하게 여름의 축축한 습기로 온 몸이 늘어지듯이 살아가는 동사무소의 직원이다. 우인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제빵 강좌의 보조로 일하고 있는 빨간 머리의 미아이고, 그의 유일한 취미는 포르노사이트를 찾아다니며 외로움에 떨고 있는 자신을 치유하는 것뿐이다. 취미활동 중에 발견한 사이트에서 그가 만나게 된 사람은 ‘구두 신은 아사코’였다.

‘구두 신은 아사코’인 아야는 도쿄에 살고 있는 대학 재수생으로, 자살을 준비하고 있는 소녀이다. 그녀는 자신의 생일 날, 시간이 모호해지는 날짜 변경선에서 스스로 숨을 참아 죽기로 결심하고, 알레스카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돈을 모은다. 아야가 ‘구두 신은 아사코’로 돈을 모아 알레스카 비행기를 타고, 우인 역시도 일상을 뒤로 한 채 알레스카로 떠나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다.

이러한 인연으로 알레스카에서 만나게 된 우인과 아야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마치 오늘이 어제가 되는 날짜 변경선을 지나는 것처럼 영화의 끝은 시작으로 바뀌어 버린다. 영화는 이제 끝이날 테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과 도쿄라는 다른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일상은 너무 무겁게 짐 지워진 삶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도시라는 공간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외로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불확실하게 느끼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울과 도쿄라는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던 우인과 아야가 보여주는 두 편의 이야기는 인터넷을 통해, 비행기를 통해, 그리고 인연을 통해 한편의 이야기가 된다. <순애보>는 무료한 일상과 연애담, 소프트 포르노, 관음증, 인연, 노스텔지어, 엑조틱, 외로움, 성장, 여행이라는 다양한 코드들을 하나로 묶고 있으며,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의 무게를 무겁지 않게 표현하고 있다. 어쩜 영화의 끝부분일지도 모를 길에서 시작하고 있는 이 영화는 여행이 가져오는 가벼운 설레임과 우연이 만들어내는 인연을 돌아보게 하는 영화이다.

기시감(旣視感)이란 게 있다. 보통 처음 와본 장소가 낯설지 않고 언젠가 와본 것 같을 때 이런 말을 쓰지만, 그것은 장소에만 국한되는 감정은 아닌 것 같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느낌이 통하면서 왠지 말을 걸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들과의 인연이 기시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시감을 만들어내는 인연은 어쩜 오늘도 내 주변을 여러 번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중경삼림>에서 주인공들이 서로 알지 못하지만 서로 스쳐 지나쳤던 것처럼, <순애보>에서 서울로 수학여행 온 아야가 우인과 만났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순애보>는 알아보기는 좀 힘들지만(만약 아셨다면, 당신의 관찰력은 보통이 아닙니다) 엑스트라들이 다른 장소에서 두 세 번씩 등장하곤 한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이 스쳐 지나갔거나 한 공간에서 같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기댈 사람을 원하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쳐 가다가, 나중이 되어서야 서로를 알아보는 것일 지도 모른다. 영화 속의 우인과 아야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p.s 어쩜 제 글을 읽고 계신 당신도 언젠가 저와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영화를 봤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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