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주변사람들과 장난치고 때로는 아르바이트도 하던 내가 갑자기 사람들을 많이 모아놓고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그것두 진지하게.....
그리고 이 작업들은 예전에 생각하던 영화 만들기랑은 많이 틀렸다. 머리가 아프고 생전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예산은 많지만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 짧고 내가 게으른 관계로 나는 촬영 3일전에 시나리오 완고를 냈다. 그래서 촬영기간동안 스텝들이 죽도록 고생했다. 못난 연출을 만난 덕택에 물론 우리 스텝들은 아직 다 영화 생초짜들이다. 이제 영화과에 들어와 막 한 학기가 지났고 대학 1학년. 하지만 열정은 어느 누구보다 높았던 것 같다.
기술 스텝을 전문가분들에게 도움을 받을까도 생각했지만 촬영이니 조명이니 그냥 우리가 전부 다 했다. 나름대로 밤을 새어가며 고민하고 우리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다해서 나온 영화가 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 같은 <봉지 인간의 최후> 이다.
아마 제목에서 피터 잭슨의 <고무 인간의 최후>가 생각날 것이다. 피터 잭슨 !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다. 친구들과 주말마다 시간을 내어 영화를 찍던 그가 지금은 환타지 대작 '반지 전쟁'을 만든다고 한다.
나름대로는 재미에 너무 치중하지 않고 우리 한국 사회를 되돌아보고 싶었다. 말로 안되는 일들이 너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나라. 독재자를 기리는 기념관을 지으려 하고 빨간 색만 보면 기겁을 하는 나라.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강한 나라.
소품으로 쓰인 봉지 하나 소세지 하나에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했다. 만화적인 느낌이 나도록 의도를 했고 그래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미래의 느낌은 안 날 것이다. 왜 있잖은가 ...<블레이드 러너>나 <공각 기동대> 그 어둡고 축축한 ... 하지만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고? 아무도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9년이 그렇게 싱겁게 지나가 버릴줄 2000년이 이렇게 평범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차피 미래란 개인의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장 뤽고다르가 <알파빌>에서 그린 미래사회가 오히려 실감났다고나 할까?
관객들이 한회 2분동안이라도 잼있게 봤으면 한다.
2002년 월드컵을 앞 둔 어느 날! 한국에서는 인공지능 수퍼 컴퓨터 '박통'이 탄생한다. 박통은 세계 3차 대전을 일으키고 결국 60억의 인간이 절멸한다. 그 후 지상의 인간들은 전자칩이 내장된 봉지를 쓰고 이성과 감성을 통제 당하면서 '박통'의 지배하에 살아가고, 지하에는 '맨얼굴즈'라는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전개하여 나간다. 하지만, 맨얼굴즈들은 번번이 이들의 덜떨어짐으로 인해 격퇴 당한다. 그러던 어느날 맨얼굴즈의 지도자 '모피어수'는 지상의 예언자를 찾아가고, 예언자는 봉지의 해방자 '하이키'의 존재를 예언해낸다. 이제 맨얼굴즈들은 지상으로 올라와 하이키를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봉지를 쓰고 작업중인 하이키. 그는 자신이 지상의 예언자가 봉지의 해방자라 지칭한 예의 그 '하이키'인 줄 모르고 있지만, 서서히 통제 받는다는 것에 대해 각성하기 시작한다. 그의 옛 연인이었던 '아디도스'는 아직 기억을 찾지 못한 상태였지만, 우연히 그녀 팬티에 새겨진 사랑의 증표를 통해 '하이키'와의 즐거웠던 한때를 기억해낸다. 이윽고 봉지인간들은 '하이키'를 중심으로 반란의 계획을 세워나가기 시작하는데...
◎ 제작후기
봉지인간의 최후 촬영을 마치면서 생각나는 것을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1. 크랭크인 전...우리는 너무나 심각한 마음으로 그리고 각자의 의견을 열변을 토하며 회의를 하고있었다. 장소는 신이문 역 주변의 한 카페. 우리를 힐끔 힐끔 마치 수상한 간첩을 보듯이 바라보는 종업원...그리고 우리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숙덕거림. 우리는 몰랐다. 그 때 우리가 나누던 대화들이 일상 용어가 아니었음을... "그러니까 거기서 맨얼굴즈를 죽여야 된다니까!"" 비닐 군대의 무기는 소세지가 어때?" "좌약을 꼭 넣어야 되냐?"등등...
2. 스텝들이 배우들을 부를 때 그 배우의 이름을 알면서도 배역을 부르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심지어 배우들은 자신의 실제 이름을 부르면 못 알아 듣기까지 했다. 근데 스탭중 어느 누구도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지 못했다. 촬영장엔 항상 이런 희귀한 이름들이 난무하였다. "모피어수씨! 밥먹어요" "하이키! 옷갈아 입어요" "아디도스! 시험은 잘 봤어?" "맨얼굴즈! 분장하세요!" 그리고 직책으로 계속 불리며 아직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있는...."붐맨형! 붐나와요!"
3. 우리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배우들이 (맨얼굴즈를 제외하고는) 봉지를 쓰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엑스트라 동원에 굉장히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곧 한 명이 봉지 쓰고 얼굴만 가리고 나오면 되니까. 하루에 3명의 죽는 비닐 병사를 한 스텝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건. 우리의 촬영 날짜는 바로 뙤약볕 쨍쨍.. 날씨는 후덥지근한 여름. 그것도 한 낮의 촬영이었다는 데 있다. 특히 비닐 군대는 옷도 인조 가죽으로 만든거라 안그래도 후덥지근한데 얼굴에 비닐까지 쓰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다. 그 기분. 검은 비닐 봉지를 써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 엑스트라로 비닐 군대를 했던 스탭들은 그 후 검은 비닐 봉지만 보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4. 코메디 영화여서 그런지 촬영중에 웃어서 ng가 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연출이랑 촬영감독이 남자주인공의 심각한 표정연기에 무려 14번의 NG를 내 스텝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5. 아름다운 청년 사건 마지막 엔딩씬에서 불지르던 스텝 이 모씨는 절대 <다이 하드2>처럼 기름이 붙지 않는다고 장담하다가 (아마 '일밤'에서 실험도 했져?) 한 줌의 재로 변할 뻔함. 영화의 크래딧에 -이 모씨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라고 쓸 뻔함. 그랬으면 영화가 처음부터 아주 진지해질 뻔함. MS형 정말 수고했어여!
6. 종이가방 구하기 사건 각양각색의 봉지를 구하러 청량리 상가 일대를 뒤지던 연출부 이 모양과 일행은 종이 봉지를 일일이 머리에 써보고 치수를 재보는 엽기 행각으로 일대 옷가게 점원들에게 또라이 취급을 받음.
7. 상한 소세지 사건 비닐제국의 주 고문무기인 소세지를 먹어버리는 엽기행각의 맨얼굴즈 역할인 JW군이 열심히 먹었던 소세지는 상한 것으로 밝혀짐. 연출은 이 사실을 알고도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모른 척 했다는 후문.
8. 엑스트라 파토나다! 주된 엑스트라인 비닐 병사의 옷은 '완전 무통풍 질식형 원피스' 형의 비닐옷으로 몸안의 온기를 그대로 보존하기 때문에 한 번 엑스트라 해본 이들의 입소문에 의해 엑스트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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