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가 말하는 정의(正義)와 변호사가 말하는 정의(正義)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도 그들이 가족이라는 연줄로 묶여있다면 상황은 얼마나 얽혀들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는 어김없이 또 비꼬기 시작한다.

이 영화를 서스펜스 스릴러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맹점이 있다. 미모의 여비서와 벌인 하룻밤의 어긋난 관계를 축으로 영화는 잠시 두 사람간의 밀고 당기는 심리전이 교차하다가 느닷없이 협박과 살인이라는 고전적인 서스펜스 장르의 엉뚱한 학습 도구들을 펼쳐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재미있게 이야기가 펼쳐진다면 관객들의 교화에 어느 정도 성공했겠지만 이 영화는 '아니올시다' 이다. 여성문제에 관한 진지한 성찰은 시나리오 초고부터 잠들었던 부분이고, 스릴러라고 추켜세우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밍숭밍숭 허전하기 그지없다. 여비서인 소피 레논(가브리엘 앤워)은 상사로부터의 강간을 경찰에 신고하기를 주저한다. 물론 여기까지는 남성들이 생각하는 여성의 선천적인 약함(?)에 관한 이미지에 원형을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직장 상사인 캘럼 크레인(빌 풀맨)이 자신을 부당하게 해고하자 그제서야 여성의 한(?)을 분출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오유월에 서릿발이 날리는 정도는 아니니 '위험한 정사'의 글렌 클로즈를 상상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 같다. 하긴 그러기라도 했으면 '욕'은 조금 먹었겠지만 흥행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 같지만...

솔직히 영화 더 길티(the guilty)는 캘럼과 소피의 관계가 주를 이루지는 않는다. 돌아온 아들 네이선 코리겐(데본 사와)과의 중첩된 관계가 영화 후반부를 이끄는 축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이선이 소피를 좋아하고 있다면 상황은 약간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감독인 앤소니 월러는 '무언의 목격자'에서 여성의 심층적인 공포에 대한 단상을 잘 표현하는 내력을 지녔던 경험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피를 피해자 이상의 시선으로는 바라보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의 초점이 아버지와 아들, 법을 집행하는 아버지와 법을 어기는 아들로서 다뤄지는 대립의 관계에 두 부자가 놓여 있다는 사실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소피와의 강간에 얽힌 사건은 일반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범죄라는 점에서 강력한 흡인력을 얻을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뒷마무리에 엉성함은 영화 전체를 우습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관객들이 보기에는 범법자 아들이 법관인 아버지를 만났다는 사실보다 그 아버지가 추행한 여성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더 큰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 점을 간과했고, 영화는 마지막의 썰렁한 반전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굳이 끝까지 손에 땀을 지어가며 볼 필요도 없는 삼류 에로틱 스릴러로 내려앉고 만 것이다. 영화는 손바닥을 뒤집듯이 너무나 안이하게 다뤘던 소재를 통해 거꾸로 그 소재의 중압감에 영화 내내 시달린 듯한 인상을 남기고 만 것이다.

영화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인물들의 시선과 시선(소피의 상해와 죽음)은 동일 선상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처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의 목격자'에서 보여 주었던 전방위의 놀라운 다재다능함은 이 한편으로 잠시 주춤거리게 될 것 같다.

p. 네이선의 친구들이 고리대금업자들에게 폭행을 당하면서 고리대금업자가 부르는 노래를 유심히 들어보기 바란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볼만한 장면이라고 추천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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