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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X (1992, Malcolm X)
미국 / 영어 / 드라마 / 194분 12세관람가 / 1993년 06월 05일 개봉


출연: 덴젤 워싱턴, 안젤라 바셋, 토미 홀리스
감독: 스파이크 리
각본:
촬영:
제작: 라르고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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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성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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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X> 유감 (8/10)

글: 박용하
2001년 12월 31일

조회: 3971

양동근이라는 배우를 난 참 좋아한다. 그의 수더분함을 넘어서서 지저분해보이기까지한 외양부터 시작해서 어눌하고 조리없는 말투까지 모두 좋아한다. 하지만 하나 좋아하지 않는게 있는데 그건 바로 그가 본업인 '연기'보다 '힙합전사'로 사는 것을 더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의 솔직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상상력이 뛰어난 사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나는 종종 내 조상이 제주도에 난파당한 흑인이 아닌가 싶다'라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있어서 흑인의 이미지, 넓게는 아메리칸 흑인의 힙합문화가 왜곡되어 있는가를 떠올려 본다.

그저 한번도 국외로 나가본 역사가 없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니 그리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어서 주워들은 역사나부랭이 같은 것이나 흑인감독이 만든 흑인소재의 영화, 특히나 이 '말콤 X'와 같은 영화를 보면 그들의 래핑이 단지 돈없는 슬램에서 소일로 만든 취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꽤 오랜시간동안 미국이라는 땅덩이에서 받아온 억압과 피눈물, 그리고 알게 모르게 습관화된 물신주의, 노예근성(과격한 단어이고 피하고 싶은 단어이지만 마땅히
이 단어외에 그러한 심리를 표현할 단어가 없어서 표기함을 밝힙니다),차별, 생존을 위해서 가질 수 밖에 없는 경제적 논리들을 그들의 폐부에 담아 놓고 분노로 끓여내어 쏟아뱉어대는게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가장 리얼리즘에 가까운 음악이 아닌가?

최고의 미남흑인 배우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덴젤 워싱턴은 이 영화에서 동네 양아치에서 과격 이슬람 종교주의자, 흑백 분리주의자로 흑인 인권운동사에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말콤 엑스'라는 복합적인 인물로 변화하는 과정을 매우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꽤 긴시간의 런닝타임인데도 불구하고 실존하였던 그의 삶의 변화폭이 너무나 컸기에 성격 묘사 부분에서 때로는 단층이 보이긴 하지만 그의 연기는 탁월했다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고수머리를 펴기 위해 독한 약품으로 스트레이트를 하는 동네 한량을 연기할때는 딱 그만큼의 눈빛으로 세상을 보았고 절도 행각을 벌이다 교도소로 들어가서 이슬람 원리주의자를 만나 교화되고 무슬림이 되었을때는 딱 그만큼의 눈빛으로 세상을 보았다.

말콤엑스는 그 시대의 다른 흑인인권운동가와는 다른 길을 갔다. 그는 현실적인 힘의 우위를 인정하였고 그런 점에서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해달라는 주장 대신에 백인들을 적으로, 동물로, 악마로 규정하며 그들과 분리될 것을 요구하였다. 표현이 과격하기는 하였지만 백인들이 만들어낸 서구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온몸으로 겪었고 그러한 체제가 얼마나 비인간적일 수 있을까를 몸소 체험하였던 당시 흑인빈민층에게는 매우 솔직하고 정확한 주장이며 설교였었다. 그는 흑
인들이 무장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백인들과 구별되는 철두철미한 금욕주의로 돌아가 그들에 의해서 타의로 더럽혀진 육신을 정화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다른 흑인 인권운동이 결국 국가의 양보, 국가의 체제를 유지하는 테두리 안에서 밖에 성과를 얻어내지 못함을 직시하고 백인들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에는 궁극적인 관심을 두지 않으며 흑인과 백인을 분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그려지는 흑인목사들의 모습과는 분명 다른 모습으로 말콤 엑스는 살아난다. 분노의 가면을 쓰고 그는 백인들에게 독설을 퍼부어 댄다. 그런 독설을 참기에는 백인들은 그리 관대한 이들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곧 말콤엑스의 권력이 커지기를 꺼리는 교주일파를 뒤에서 밀어주며 한 교회의 강연장에서 그를 암살한다. 흑인의 손을 빌어서 말이다.

1. 말콤 엑스

말콤이 교화되고 이슬람교로 귀의하면서 그는 자신의 성을 X 즉, 알지 못한다라는 뜻으로 바꾸어버린다. 이러한 고백은 자신의 선조가 백인 노예상들에게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들이였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는 다짐의 한표현이며 동시에 그러한 백인 노예상들의 횡포, 역사적 과오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분노의 한표현이였다. 그러한 점에서 그는 다른 인권운동가들의 놓치고 있는 통시적이고 역사적인 접근을 획득하고 있다. 그는 미국이라는 땅덩이에 흑인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되어있다고 본다.

영화에서 그리 비중있는 장면으로 다가오지는 않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자면 말콤이 교도소에서 목사와 설전하는 장면이였다. 목사가 예수의 행적에 대해서 설교하던 때에 그는 일어서서 예수가 성화나 백인목사가 설교하듯이 백인일 수 없다는 이유를 성경구절을 대며 조목조목 반박한다. 말콤은 흑인 자신들의 역사를 지웠듯이 백인이 스스로의 역사를 지우고 왜곡함으로 그들의 현재 지위가 하늘에서 떨어진 양 묘사하는 위선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이러한 반박은 흑인도 백인도 아닌 우리들에게 꽤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데 이는 완벽하게 조작된 신화, 한쪽이 힘의 우위를 굳건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작된 신화가 날조되었다는 폭로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볼 때 느끼는 대리만족적인 카타르시스이다. 우리 또한 흑인의 이주,납치의 역사만큼은 아니나 왜곡된 역사 안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아이와 어른의 싸움을 보자. 아이와 어른이 싸운다. 어른은 처음에 매우 귀엽게 그의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양보해도 그리 크게 손해가 될 것 같지 않은 것이 있다면 어른은 조금 튕기다가 그 물건을 선심쓰듯이 던져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칼을 쥐고 이것을 양보했다가는 조금 손해를 볼 것 같은 것을 달라고 위협한다면 그는 당장 안면을 바꾸고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서 해를 줄 것이다. 말콤의 행위는 칼을 쥔 아이의 행동과 같았다. 이런 행위가 옳은 것인가하는 문제
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 그런 길로 내몰릴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그러한 상황 전반까지도 질문에 포함하여야할 것이다.

2. 풍자

풍자라는 표현양식은 비판대상이 기술주체보다 외부적 힘이 강대해서 기술주체가 비판대상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방법을 말한다. 흔하게 한동안 널리 유행했던 D.D.D나 땡전뉴스와 같은 기술이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코미디 프로같으면 김형곤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과 같은 프로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풍자는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매우 통렬함을 준다. 은근한 비꼼으로 인해 비판대상의 잘못된 점, 부조리한 점을 지적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풍자는 단지 기술주체나 그것을 보고 즐기는 사람들 모두가 비판대상보다 현격히 약하다는 보여주기도 하는 쓸쓸한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찰리 채플린 영화를 보면서 슬픔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국가, 넓게 말해서 사회는 그 틀을 유지하려는 보수성을 그 기반으로 한다. 이것이 옳은 것인가하는 문제가 있겠지만 차치하고서라도 그러한 현상만을 놓고 볼 때 국가는 어느정도 자신에 대한 비판과 질책을 허용한다. 이러한 헛점을 보이지 않거나 헛점에 대한 비판을 탄압하게 되면 구성원은 그들이 놓인 억압의 체계를 직시하게 된다. 그렇게 될 때 사회는 붕괴될 위험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쥐잡을때 도망갈 구멍은 놓아두라는 말은 단지 속담으로 그치지 않는다. 일정부분의 완충지대, 이것이 사회를 큰 변화없이 유지시키는 그들만의 비법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비법이 허위임을 깨닫게 되는 몇몇 사람들로 인해서 사회는 위협을 받게 된다. 말콤이 저명한 흑인 사회학자나 흑인 인권운동가들을 집지키는 개정도로 치부한 이유는 그렇기 때문이다. 그들은 완충지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풍자라는 방법을 포기하고 직설법으로 다가서는 이들에게는 결코 가벼운 처벌만을 두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가장 커다란 죄목이 걸리고 가장 효과적인 형태로 죽음을 내린다. 헤게모니 투쟁에서 말콤과 같은 부류는 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후 흑인 폭동과 같은 간헐적인 분노의 폭발을 제외하고 흑인 인권의 신장은 그렇게 눈에 띄게 이뤄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흑인의 인권문제는 히스패닉,동양인들의 불법입국 증대로 인한 유색인종 내부의 갈등요인 증폭으로 인해 정체되고 있다. 또한 9.11 사태 이후의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랍인들에 대한 인권탄압은 경악할정도의 수준에 이르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아랍인들은 9.11 테러 이후, 그리고 어불성설인 '무한 정의 전쟁'의 패전 이후에도 탄압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는 50년대 매카시 열풍에 준하고 있는 듯 보인다.

흑인들 뿐만 아니라 백인들 전체가 유색인종들에게 탄압과 차별의 채찍을 들어대고 있다.

3. 다윗 신화의 좌절

다윗 신화는 유대인들의 가장 커다란 지표이며 상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처형한 이래로 지금껏 서구세계에서 지독한 왕따를 당했다. 그들의 혈통 중심의 비개방적 단절, 종교적 상이성, 그리고 강고한 선민의식, 이런 것들로 인해 그들은 지독히도 철저히 왕따의 길을 걸었으며 이런 점들이 장점이 되어 그들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혈족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다윗과 같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서구사회에서의 리더자리를 꽤차고 있다. 뜬금없
이 꺼낸 유대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정도 모습을 달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흑인들을 보는 것과 같다.

흑인들은 유대인과 똑같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떨어져 미국이라는 땅덩이에 유폐되었다. 물론 그들이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고향에서 떨어져있다는 점은 똑같다. 또한 그들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배척을 받았다. 단지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그들은 노예생활을 겪었다. 신사의 나라인 영국에서도 흑인들은 노예로 일했다. 단지 흑인이 미국사회내에서 불안요소로 부각되기 때문에 미국하면 흑인인권문제가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일 뿐이지, 흑인들이 왕따를 당했던 것, 아니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 건 세계 어느 곳에서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생각해보자. 다윗이 과연 혼자였을까? 다윗의 신화를 보면 유대인들도 그러하거니와 다윗역시도 자신이 혼자였다고 믿지 않았다. 성서에서 제일원인으로 파악하고 있는 여호와, 야훼, 하나님이 다윗을 지켜준다고 성경기자도, 다윗도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러한 해석을 신비주의적인 해석이다라고 반박할 수도 있으나 성경을 호의적으로 읽는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다윗의 신화에서 골리앗과 싸운 것은 여호와, 야훼, 하나님이지 결코 다윗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지금 세계를 움직이는 큰 손이 된 것은 단지 개개인의 유대인의 힘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모아둔 자본이라는 거대한 배후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말콤이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배후의 신도들의 힘, 억압받는 흑인들의 분노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는 미국사회 전체를 변화의 바람으로 몰고가기에는 미약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은 정말 양만 치는 소년이 아니다. 소년의 돌팔매로는 골리앗을 이길 수 없다. 검은 다윗의 신화는 좌절된 것이다.

4. 결론

여러가지 생각을 해본다. 칼럼에 손을 대고 영화에 대해서 좀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일년 동안은 개인적으로도 영화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었던 한해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각종 영화평론프로나 평론지들에서 떠들어 대는 만큼 좋아만 해야할 것인가?

관객의 절반이 한국영화를 보는 것, 이것이 과연 긍정적으로만 보아야할 것인가? 이런 현상이 헐리우드 산업시스템의 한계, 소재의 고갈로 인해 얻어진 반사이익이라면 어떠한가? 올 한해동안 진정 한국적인 특성으로 가진 영화, 그런 영화가 양산이나 된 것일까?

아쉽게도 다들 인정하고 있기는 하되 산업적인 측면에서의 부흥만을 놓고 우리는 기뻐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벌써 샴페인을 터트리기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지속성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정체성이 근본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말콤엑스의 마지막은 아이들이 수업을 받는 장면과 실제 말콤엑스의 생애를 다큐적으로 편집한 화면으로 끝난다. 감독은 다음세대의 행복은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 달린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 것이다. 다윗의 신화, 그것은 기득권의 완충을 위해서도 요청되기도 하지만 잃을 것하나 없는 이들의 희망을 위해서라도 요청된다. 그것을 어떻게 잘 별러 상대를 찌를 수 있는가는 각자에게 달린 것이다. 그것이 무모한 돌팔매라도 말이다.

한국영화는 이제 내실을 다져야할 때이다. 메머드급의 극장들이 숱하게 탄생되어 가는 상황에서 이제 바야흐로 한국영화계는 산업적인 면모를 완벽하게 갖춘 셈이다. 수억에서 수백억씩 충무로로 쏟아지고 있고 매일 수십건의 영화 기획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과연 소비자로써가 아닌 주체자로써의 관객을 상정해두고 있는 기획사,감독들이 몇이나 있을까?

영화의 주인은 바로 관객이다. 감독과 배우, 영화 배후에는 관객들의 손때와 정성이 묻은 7000원의 정성이 놓여 있는 것이다. 좀더 좋은 영화를 보기 위한 노력, 이제는 해야할때가 되지 않을까?

ps. 영화 말미에 나오는 추도사입니다. 클릭!
ps2.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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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X> 유감 - 박용하 (2001/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