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산고]는 무림 세계의 고등학교 이야기입니다. 때는 17년에 걸친 전교사화의 대환란으로 학풍이 잔뜩 거칠어진 '화산 108년'으로, 전교생이 무림 고수인 화산고에서는 일인자가 되어 전교사화를 잠재웠다는 전설의 책 [사비망록]을 독차지하기 위해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학교를 평정한 송학림의 밑에서 간신히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화산고의 균형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깨져버립니다. 교장이 암살당할 뻔하고 송학림이 교장 살인범으로 몰려 감금되고, 교감은 교장이 숨긴 것이 분명한 [사비망록]을 찾기 위해 외부에서 학원 오인방을 불러들입니다. 다른 학교에서 여덟 번이나 퇴학당한 뒤 이번엔 제발 공부나 하려고 화산고에 들어온 우리의 주인공 무림 고수 김경수에게는 정말 난처한 상황이었어요...

2.

[화산고]는 아주 커다란 아이디어에 영화 전체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현대 학원물과 무협지를 결합시킨 것이지요.

이 아이디어는 두 가지 면에서 아주 좋습니다. 첫째, 설정이 간결하고 눈에 띄기 쉬워서 마케팅에 유리합니다. 둘째, 학원물과 무협지는 그렇게 동떨어진 장르가 아닙니다. 모두 상당히 폭력적일 수 있으며 무정부주의가 판을 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죠. 종종 과장되는 무협지의 감정은 틴에이저의 감수성과 크게 떨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세계가 융합되면서 상당히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종종 영화는 [버피]가 그랬던 것처럼 실제 학교 생활에 대한 직접적인 은유를 깔기도 합니다. 경수가 겪는 일들은 경수같은 아이들이 전학 간 학교에서 쉽게 겪을 수 있는 일들을 과장한 것일 수도 있죠. 온건파 교장과 암기파 교감의 대결 역시 그렇게 머리를 쓰지 않고도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산고]에는 그만한 야심은 없습니다. 영화는 거창한 은유보다는 시대착오적인 액션 코미디를 만드는 데 훨씬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습니다. 아니, 이건 나쁜 일이 아닙니다. 늘 큰 이야기만 할 필요는 없죠.

문제는 그 아이디어가 충분히 살아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이디어가 기가 막히게 좋은 작품들이 자주 겪는 일이죠. 아이디어가 너무 그럴싸하다보니 정작 세부를 다듬는 데 신경을 덜 쓰는 겁니다.

[화산고]는 쉽게 지치는 영화입니다. 무협지를 흉내내는 도입부에서는 관객들도 키들거리면서 웃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투가 별다른 변화 없이 영화 끝날 때까지 반복되면 금방 약발이 닳아버리죠.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별다른 강약 변화 없이 같은 강도를 유지하는데, 그것도 상당히 단조롭습니다. 그렇다고 자체적인 이야기가 강한 것도 아니고요.

보도 자료에는 스토리의 짜임새나 캐릭터의 입체감보다는 현란한 볼거리와 감각적인 편집에 더 신경 쓴 영화라고 하더군요. 변명의 일부는 맞습니다. 재미있는 영화가 꼭 짜임새 있는 스토리를 갖추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스토리에 '즐거움'이 빠져 있다면 그건 꽤 큰 문제입니다.

3.

영화는 스토리보다는 비주얼 쪽이 재미있습니다. 사방이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70년대 고등학교 같은 화산고의 모습은 그 자체로도 인상적입니다. 구식 교복을 입고 머리 염색을 한 젊은이들이 [매트릭스]식 무협물과 70년대 청춘물을 적당히 섞은 대사를 읊어대며 와이어 액션을 하는 모습도 흥미롭고요.

그러나 이 역시 조금 변화를 주어도 될 듯 했습니다. 비주얼의 약발은 소개 즉시 반은 닳아버리는데, 이 영화의 비주얼도 초반 아이디어를 변화없이 끝까지 밀고 가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액션을 꾸며주는 디테일과 테크닉은 여전히 좀 부족해요.

4.

장혁(A)의 연기는 단 두 가지입니다. 어깨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어벙한 표정을 짓는 것 하나. 똥폼을 있는 대로 잡고 무협 액션을 벌이는 것 하나. 하지만 효과적인 연기가 꼭 어휘가 많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김경수라는 캐릭터는 이 두 가지만으로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끝까지 몽땅 표현됩니다. 더 이상 바랄 필요는 없지요.

장혁보다 더 재미있는 역을 보여주는 배우는 화산고의 2인자 장량을 연기한 김수로입니다. 단순무식한 건 마찬가지지만 과장의 폭이 넓고, 일단 배우가 캐릭터를 잔뜩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서 보기 재미있었답니다.

신민아는 지루합니다. 우선 캐릭터 탓이에요. 전체적으로 여자 캐릭터가 약한 각본이지만 채이는 백짓장처럼 밋밋한 캐릭터거든요. 단조로운 연기도 과장이 하늘을 찌르는 동료 연기자들과 쉽게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허준호나, 윤문식, 변희봉과 같은 '어른 배우들'은 보다 노련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그들의 앙상블에는 종종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런 종류의 비사실적인 영화에서는 양식화된 테크닉의 통일이 필요한데, 그게 좀 모자란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과장할 필요 없이 눈에 힘을 주고 액션만 하면 되었던 허준호 쪽이 문제가 가장 적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5.

[화산고]는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방심해서는 안된다는 훌륭한 교훈을 주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아이디어의 힘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이야기가 단조롭게 흘러갔다고 해도 와이어를 달고 날아다니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은 쉽게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기타등등

사운드가 굉장히 둔하더군요. 서울 극장 탓인지 영화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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