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 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철저히 베일에 가린채 주목을 받아온 배창호감독의 흥행재기작 <흑수선>.

그 실체가 처음 드러난 어제 전 실망감을 가득 안은채 극장을 나서고 말았습니다. 이제 배창호에게 흥행을 기대한다는건 무리라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러브 스토리>와 <정>도 재밌게 봤지만 한마디로 <흑수선>은 이 두 영화보다도 못합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제가 말하는게 아닐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아마 이 영화에 기대를 건 사람이든 아니든 이 영화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있었을겁니다. 50년전 전쟁당시의 사랑과 배신, 음모. 그리고 50년뒤에 일어나는 연쇄살인. 참 매혹적인 소재죠.

거기에 미야자키현 로케이션으로 볼거리마저 첨가하였다는데다 대규모 엑스트라를 모집한 서울역 라스트씬 촬영 이벤트는 두고두고 화제를 불러일으켰죠.

<광시곡>을 기억하십니까? 제작비 30억은 다 어디다 빼돌렸냐구 모든이가 의아해하던 그 영화. <흑수선>의 처참한 몰골은 <광시곡>을 생각나게 합니다. 액션 스릴러라고 하고선 반전이 없다시피한 평이한 이야기구조에 스케일이 실종된 액션. 배창호감독이 80년대 흥행감독으로 쌓아놓은 커리어가 어디로 갔는지 의아할 따름이죠. 하긴 배창호감독이 자신있게 내놓았던 <꿈>의 흥행이 안 좋았던걸 감안하면 어쩌면 배창호 감독은 애초에 '대작'이란 것과는 거리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흑수선>이 부산 영화제 개막작이라는건 좀 불안하군요.

안성기, 이미연, 이정재, 정준호의 화려한 캐스팅마저도 이 영화의 이러한 마이너스 요소들을 메꾸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이미연의 늙은 연기의 어색함(이걸 계기로 우리는 다시한번 한국에 중년의 원숙한 여배우가 없음을 안타까워 해야 할것입니다.)에 젊은 시절 황석(안성기)과 손지혜(이미연)의 사랑에서 느껴지는 70년대식의 낯간지러움은 진지한 분위기에서 관객의 폭소를 유발하는 역효과를 낳고야 맙니다. 오히려 다른 두축인 이정재와 정준호의 배역은 <흑수선>이 액션물보단 멜로를 택하면서 밀려났군요.

그러나 <흑수선>에도 분명 장점은 있습니다. 시각적인 쾌락은 애초에 기대하던 스케일을 제공하진 못하지만 대신에 독특한 화면질감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죠. 그리고 포로수용소 탈출장면에서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재판같기는 하지만 어느정도의 액션이 나오긴 합니다. 그러나 흔히 이런 영화에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대로 이야기를 놓친데다가 스케일과 긴장감마저 제거된 영화에서 우리가 기대할 것은 극히 적어집니다.

배창호 감독은 <러브 스토리>와 <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한뒤 다시 관객과의 조우를 위해 큰 베팅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베팅의 후유증은 클 듯하네요. 너무 극단적일지는 모르지만 <흑수선>은 한국영화의 전성기라는 요즘 시기에 찬물을 끼얹는 작품이 될 듯합니다. 우리의 블럭버스터를 다시 생각할 계기가 될 것 같군요.

내 의견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