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연극 [행복의 조건]
글: 성재원
2002년 0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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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관람은 흡사 영화를 보는 듯했다. 왜냐면 일본인 배우들이 일본어로 공연을 했기에 무대 오른편의 스크린으로 번역된 자막을 동시에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자막 스크린과 무대와의 부자연스러운 구조도 한 몫을 했지만, 자막이 올라가는 순서가 배우가 대사를 하기전에 미리 보여지게 되어 있었기에 관객은 배우가 무슨 말을 하게 될지 미리 알게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만약 극의 성격이 스릴러물처럼 문제를 풀어가는 식이었다면 그 파장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나 역시 까탈스러운 완벽주의자도 아니고, 외국의 극단 공연이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묘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가족 구성원들이 겪는 사건들로 구성된 이야기지만, 전체적으로는 잔잔한 호수의 물결 같은 느낌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사건을 일으키는 당사자와 그로인해 상처받는 가족들의 갈등이 계속 이어진다. 재밌는 대사와 몸동작으로 간간이 웃음이 터지기도 하지만, 실제 상황으로 추측해본다면 힘겨운 상황들이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로 인한 상처나 갈등으로 인한 고통이 다음에 발생하는 사건을 통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새로운 인물들이 출현하고 기존의 인물들은 새로 발생한 사건에 전념하기에 정신없다. 그래 망각이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처럼 이 가족은 각각의 구성원들이 몰고오는 사건들 때문에 조용한 날이 없지만, 가지를 흔든 바람은 곧 저편으로 사라지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으며 개인의 내면에 남은 상처는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보이지 않게 시간이 흐르며 잊혀지고 아무는 것이다. 망각이 바로 행복의 조건이다. 이 연극은 망각의 플롯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잔잔한 듯 하지만, 급하게 이야기를 몰아가고 있다. 인물들이 기억을 되살리고 그로인해 아파하고 고통할 구조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다.
망각의 플롯안에는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의 존재가 두드러진다. 건강인의 입장에서 치매를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그것을 망각의 완전한 지배라고 하련다. 아픈 기억은 물론 기쁜 기억, 경험까지도 깡그리 해체시켜 버리지만 기본적으로 슬픔, 상처가 존재할 수 없기에 그리 손해보는 계산은 아니다. 다행히도 극중 할아버지는 소중하고, 행복했던 기억들만을 되살릴 수 있는 특수한(?) 치매증상을 보인다. 물론 현실과 과거를 혼동하는 시간적 개념은 해체되어 있지만 말이다. 행복의 조건은 추측컨대 선택적 망각일 것이다. 불가항력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아픈 사연들을 잊어버리고 주어진 상황을 기쁨으로 일구어가면 행복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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