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선비 조남명] 진정 배운 자로 산다는 것
글: 손정호
2001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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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선비 조남명"은 단순한 역사의 고증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고 느꼈다. 역사를 재현해서 극으로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극중의 역사적 현실과 지금의 현실이 맞물려 가면서 연극은 현재의 우리가 처한 현실을 향해서도 말을 해준다고 느꼈다. 사람이 사는 때와 곳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권력과 그 권력이 가지는 욕심 밑에서 희생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배운 자들의 고민과 갈등을 "시골선비 조남명"은 적절하게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배운 자, 지식인으로서 깨어있는 사람이 되어가고자 무단히도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진정한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자칫 진부하고 지루해질 수 있는 주제를 적절한 대사와 모습으로 잘 형상화했다는 점이 좋았다. 특히 표현적인 면에서 눈에 많이 남았던 것은 대사를 창의 형식을 빌려서 처리한 부분들과 택견이나 한국무용 등의 요소가 가미된 몸 동작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사약을 받고 죽은 선비들이 일어나서 춤을 추고 대사를 하는 장면들은 아주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당대의 선비들의 올곧음과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주장하다가 불합리한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한 한이리라'는 생각이, 어떤 긴 대사보다도 죽은 그들의 춤 하나, 같이 하는 짤막한 대사 하나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음향적인 면에서도 한국적인 매력을 잘 살려낸 편이라고 생각한다. 극 초반부에 북을 뚜드리며 등장하는 관청 사람의 북소리가 동숭홀에 울려 퍼질 때의 생동감은 참 아름다운 것이었다. 북소리가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또 중간 중간에 흘러나오는 가야금과 거문고의 애절함은 어쿠스틱 기타나 일렉 기타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조남명이 혼자 고민에 잠기는 부분에서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나오는 부분이었다. 북소리와 가야금, 거문고 소리, 전통적인 춤사위, 토속적인 무대장치를 계속 듣고 보다가 갑자기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들리자 조금 어색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 기타 연주도 분위기를 잘 살려주는 선곡 중에 하나였기는 했고 극 전체에 어떤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소리에 민감한 나로서는 약간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또 하나 맘에 들었던 것은 바로 구성적인 면에 있다. 보통 우리는, 그것이 일제의 잔재인지는 모르지만, 선비라는 단어에 존경심을 갖거나 긍정적인 인상을 깊게 갖고 있는 경우는 드문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면이 없지 않았기에 "시골선비 조남명"이란 이름을 단 이 연극이 '선비라는 존재를 억지스럽게 미화하지는 않을까?', '무조건적으로 선비라는 존재의 긍정적인 면들만을 들추어 보여 주려하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골선비 조남명"은 처음부터 시골선비라는 존재를 긍정적으로만 그려간 나머지 대상에 대한 미화라는 덫에 빠지지 않는 균형감 있는 구성을 지니고 있었다. 조남명의 어머니와 부인은 시골에 파묻혀서 글만 읽는 조남명의 비현실성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꼬집고 조남명은 그런 자신에 대해 반성한다. 그리고 토정 선생이 멋진 도포를 휘날리는 조남명을 향해, 세상에 허위의식에 몸을 실으려 하는 조남명을 향해, 똥을 싸는 행위로 조롱 같은 충고를 하자 조남명은 자신에 대해 다시 한번 반성한다. 이처럼 선비라는 존재를 처음부터 어떤 되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진정한 선비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진정한 선비의 가치와 진정한 선비가 되는 어려움을 보여주고 전통적인 것에 대한 일방적인 긍정이라는 유치함도 피해감과 동시에 극의 구성에 흐름을 주어 관객을 극의 흐름 속에 잡아두는 기능도 했다고 생각한다.
"시골선비 조남명"의 갈등은 선비와 부패한 사회, 진실과 거짓의 갈등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조남명을 비롯한 극중의 많은 선비들은 자신의 권력독점을 위해 명종을 이용하는 무리에 목숨을 내놓고 진언을 한다. 그런 부분들은 현재에까지도 연결되어지는 것이고 유효한 교훈적 되새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것과 권력을 앞세워 국민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세력을 탄압하는 것은 지금도 흔한 일이고 지금도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다. 조남명을 비롯한 내 조상들의 진실을 향하려 하는 용감한 선비정신이 크게 감동 받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반성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시골선비 조남명"에서 솔직하고 우직한 상소를 올린 조남명은 스스로도 사약을 예상하였으나,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점은 어둠 속에서도 어디에선가 자신을 들어내고 있을 진실에 대한 연출자의 희망적인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시골선비 조남명"의 그런 갈등 해결도 참 맘에 드는 부분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역사는 자유와 평등과 같은 진실 된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들을 온 몸으로 지키고 획득하려 온 이들에 의해 쓰여진다고. 그리고 그런 이들의 노력이 그 순간에는 억압 세력에 의해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런 노력의 흔적은 분명히 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새로운 아침의 시간을 당겨 올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노력의 반복으로 우리 인간은 발전해 나가는 것이라고.
조남명은 사약을 받지 않고 살아남는다. 그리고 큰 조명들이 꺼지고 한 개의 조명만이 조남명을 비추고 그 조명도 서서히 꺼져가며 조남명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하지만 연극을 다 보고 난 내 가슴속에 조남명은 작지만은 않은 모습으로 서있다. 내게 있어서는 "시골선비 조남명"은 참 인상깊은 연극이었고 연극이라는 예술 매체의 매력을 확실히 느낄 수 있게 해준 작품이었다.
시골선비 조남명
- 극단: 우리극연구소
이 연극은 선비(Learned Man)란 이름으로 불리웠던 한국 전통지식인, 그 중에서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한 재야지식인 남명 조식의 삶의 태도를 다룬 역사극이다.
과거낙방-궁색한 산중독서인-지식불모지대에서의 교육활동-거듭되는 당쟁과 사화에 대한 정치적 환멸의 과정을 거쳐 급기야 상소문이란 재야언론을 통하여 한 시대의 환부를 찌른 한국적 지식인의 모습을 그려낸다.
시대배경은 지금 대중적 인기 속에 방영되고 있는 SBS TV 대하드라마 <여인천하>와 같은 시대이고, 문정왕후, 윤원형, 명종 등이 고스란히 등장한다.
그러나 TV드라마에 등장하는 주 인물들은 주변부적인 인물이다.
이 연극의 주 인물들은 오히려 궁중비화 드라마에서는 등장하지 않거나, 단역으로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재야 선비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당대의 민속학자 서기 등이다.
그리고 사화로 목숨을 잃은 이름들과 왕의 측근에 있었던 도승지들이 연극적 상황을 표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왕후는 궁정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임금은 고아일 뿐'이라는 상소가 던져 졌을때, 이에 대한 궁과 관료들의 반응은 지금 이곳 우리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한 편의 희비극 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목숨을 건 한 재야 선비의 상소를 무시하지 않고 그의 목숨까지 가까스로 살려 낸 당시 주위 인물들을 통해 정치적 혼돈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적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시골선비 조남명>은 정치적 혼돈과 환멸을 극복해 내면서 미래에 대한 건설적 의지를 드러내는 한국지식의 전형을 표현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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