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기준
글: 이윤형
2001년 05월 27일
세상의 기준은 분명 나이다. 어설프고 뻔한 사람이 존재하는 건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어설프고 뻔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데에는 분명 내가 배제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나'란 존재 역시 누군가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으로 해석되어진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내가 어설프고 뻔한 사람이라고 판단한 사람이 나를 그렇게 보고있고 그런 그를 또 누군가는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정말 말도 안 되면서도 슬프고 우스운 일이다.
얼마 전에 알았다. 내 목소리가 굉장히 어설프고 내 행동이 너무 뻔하단 사실을. 그 전까지는 내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시선을 난 조소했다. 그런 인간을 나는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나는 눈을 돌려 그들이 아닌 나를 본다. 난 내가 우습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이제 나는 내가 아닌 그들이다. 어설프고 뻔한 사람.
좋은 의사소통의 방법인 '말'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생각을 50%도 피력하지 못하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는 90%가량의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어설프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내가 어설프듯 내 말이 내 생각을 담지 못하는 만큼 그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에 다 담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왜 모르는 것일까. . 아니. . 난 왜 이제야 그걸 안 것일까. .
어릴 때 부모님께 그리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했던 거짓말들이 생각난다. 난 그게 완벽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떠한가. 그것은 그들의 이해심 덕에 생긴 오해이고 난 오랫동안이나 그러한 착각을 하며 산다. 나를 우상 섬기듯 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굉장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되지만 그런 모습은 나보다 많은 것을 아는 사람에게선 아무 것도 아닌 게 돼버린다. 내가 아무리 영화 평론가처럼 영화를 평가해대도 결국 평론가 앞에서 나는 영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난 영화를 평가할 자격이 없다고 한다. 왜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 되어야 하고 상대에 따라 눈치를 봐야 하는가. .
인간이 모두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유전적 요인을 제외하고 얘기한다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모두 똑같은 이성을 갖고 있었을 게다. 하지만 그들에겐 아주 조금씩 다른 충격들이 가해졌겠지. . 예를 들면 어떤 아기는 간호사의 다리를 봤을테고 어떤 아기는 가슴을, 엉덩이를, 혹은 다른 아기들을. . 아주 조금씩 다른 것을 봤고 아주 조금씩 다른 생각을 했는데 그 이후 그 아기들에게는 모든 사물에 대한 판단이 나름대로 생기게 되고 그것이 평생을 따라가 내가 어설프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이다.) 난 뭘 봤을까. .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 대체 나란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 서두에 맞춰서 조금 더 얘기하자면 그 말은 남의 심각함은 나의 심각함이 아니란 말이 된다. 나는 내 기준에 따라 심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그리고 그 외의 여러 가지 것들을 판단하게 되는데 그러면 남의 심각함은 내 기준과는 다르기 때문에 내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 된다. 재밌지 않은가. . 남이 심각한 얘기를 하면 속으로는 '그게 뭐야' 라면서 비웃는 내 모습이. . 어쩌면 그게 진짜 중요한 얘기일 지 모르는데. .
나는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를 구분 짓지 않는다. 굳이 구분하자면 영화를 보고 나서 '야! 예술이다' 하면 예술 영화라고 하는 정도. . 하지만 이렇게 기준을 세워보자. 자신의 생각을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만드는 영화가 예술 영화고 관객의 눈치를 봐서 만드는 영화를 상업 영화라고. 이러면 예술 영화는 당연히 재미없고 상업 영화는 재미있는 것이 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내리는 기준과 부합한다. 감독이 생각하는 심각함은 내 기준에서는 별 게 아니니까 재미없고 내 기분에 맞춘 상업 영화는 재미있고. . 물론 내 기분도 모르고 맞춘다고 만든 영화는 예술 영화보다 더더욱 재미없겠지. .
어차피 두서없이 시작한 내 얘기인걸. . 막 가보자. .
며칠 전에 텔레비젼 채널을 돌리다가 교육 방송 채널에서 수능 특강을 하는 걸 봤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불쌍한 아이들. . 저걸 보면서 그들이 원하는 이상 세계, 혹은 남들이 원하는 이상 세계에 들어가려고 안달을 하고 있겠구나. .'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텔레비젼을 틀어도 공부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했고 어떤 사물을 보던 그게 나를 대학으로 이끌어줄 무언가가 됐으면 했었다. 물론 나는 공부를 못했다. 그리고 안 했다. 그때는 내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는 속으로 바둥거리지만 대놓고 목을 메며 공부하는 아이들은 우스웠다. 물론 그 아이들에겐 내가 우스웠겠지. . 그렇게 멍하니 그 방송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발견한 게 수시 입학 문의를 하는 ARS 전화 번호였다. 그 번호로 누군가는 전화를 건다. 아니. . 많이 전화를 걸 거다. 그 아이들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바둥거려야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안정적인 길이 열릴 거다.
내가 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내 얘기를 하고 있냐고. .? 난 내가 원망스럽다. 난 제도권 안에서의 교육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다. 내가 학교에서 가르친 것. 그러니까 학교에서 진정 하려고 한 교육에서 얻은 건 한글과 덧셈 뺄셈 등의 아주 간단한 것들이었다. 난 그들이 가르치지 않는 걸 더 많이 얻었다. 사람이 싸워서 이기는 건 당연한 게 아니란 걸 배웠고 인간들의 모습이 우습다는 걸 알았다. 물론 이런 건 학교의 교육 제도가 원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난 지금 대학을 다니고 있다. 절대 누군가에게 배워서 습득되어질 순 없는 것이라고 내가 강력히 주장하던 영화를 공부하고 있다. 물론 내 생각은 달라진 게 없다. 그러니 당연히 학교에서 배우는 건 내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난 그저 초등학교 때처럼 가르치는 것이 아닌 내가 배울 것을 얻는다. 하지만 이젠 싫다. 영화를 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이려 득 되는 것 없는 학교를 다니는 내가 싫고 남의 눈치 보는 인간이란 것들이 싫다. 하지만 난 겁이 많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칼을 손목에 대고도 긋지 못하는 난 분명 겁쟁이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 두지 못하겠다. 그래서 난 자꾸 내 안으로만 파고든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 내게서 '말'을 들을 뿐 내 생각을 들을 수 없는 인간이란 존재가 싫으니까. .
어제 우리 씨네라인에서 글을 쓰다가 유명한 영화 잡지로 간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반가웠다. 그 형 역시 내 이기적인 판단에서 비껴나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란 나약한 존재는 싫어하는 인간을 반가워하니까. . 그리고 하는 말이, 나를 인터뷰하겠단다. '씨네마떼끄에 몸을 바친 영화 청년. .'? 뭐 그런 거라고 했다. 신경 써서 듣질 않아서 잘은 모르겠다. 뭐 영화 좋아하는 애들 몇 명 인터뷰하는 것 중 하나겠지. .
물론 나는 안다. 나도 누군가를 인터뷰하는 기자니까. . 인터뷰를 하면 결과적으로 실리는 글에는 인터뷰 대상자가 없다. 오직 편집자만 존재할 뿐이다. 그가 판단한 인터뷰 대상자. 그러니까 나란 존재는 없고 그가 생각하는 나. 그에게 중요한 나만이 있을 뿐이다. 그건 내가 아니다. 내가 중요한 건 그와는 다르니까. . 그리고 그건 분명 한 페이지도 채우지 못할 토막 글일 거다. 나는 안다. 어떠한 사람도 그만한 글보다는 생각이 많다는 걸. 하지만 난 내가 그 정도의 존재밖에(?) 안 되는 걸 한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겁이 많은 나를 한탄할 뿐이다. 용기 없는 나를 원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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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없는걸까. . 내가 사람들을 삐딱하게 보고 그들 역시 나를 그렇게 봐서 그런가. . 지금 있는 사람들을 원하는 자리로 재배치하면 모두들 행복할텐데. . 내가 확실히 어리긴 어린가보다. 이런 누구나 한 번쯤 하는 걱정을 하고 있으니. .
아∼ 조금은 후련하다.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만큼은 후련하다. 어차피 설명할 수 없는. . 느낌으로만 포착이 가능한 생각은 남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써의 매력이고 고통이니까 이젠 그걸 안타까워하진 않는다. 이젠 아무 고민도 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하면 비평의 경계를 넘어서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혹은 내가 어떻게 하면 창작자의 마음을 최대한 이해할 수 있을지. . 그런 걱정도 하고 싶지 않다. 단 며칠이라도 좋으니 기쁘고 싶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그 말은 나 아닌 사람에 의해 해석되어지고 난 그걸 또 후회하게 될테니까. .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건. . 우리 씨네라인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다. 난 그들을 사랑한다. 그들이 좋다. 물론 위에서 말한 사람들과 그들이 다르진 않고 그들에게 나 역시 그러하겠지만 그들이 좋다. 가끔은 생각한다. 아주 유명한 잡지에서 나를 부르거나 나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영화를 만들라고 하는. . 그때마다 생각나는 게 이제는 나의 미래가 아닌 씨네라인의 미래다. 어제 유명한 잡지의 기자. . 그 형한테 전화 왔을 때도 난 우리 사이트 대표 형한테 먼저 전화를 했다. '조금이라도 씨네라인에 피해가 가는 일을 내가 하지 않을까. . 그 형은 나를 잘 아니까. . 나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 해서. . 난 대표 유창이 형 말고 편집장 상열이 형도 좋아한다. 상열이 형이 군복무 중일 때 처음 만났는데 어떤 면에선 웃기면서도 좋았다. 그리고 맏형 은성 선배도 좋다. 얼마 전에 결혼했는데 결혼식 중에도 촬영하는 나에게 언제 왔냐며 반겨줬다. 그리고 잘 모르는 우리 씨네라인 가족들도 다 좋다. 정말 나란 놈이 우습다. 사람이 싫다고까지 말해놓고. . 씨네라인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도 그렇고 말도 안되는 인터뷰를 내가 아는 형이 한다는 말에 기쁜 것도 그렇다.
난 우리 씨네라인이 유명했으면 좋겠다. 언제든 뭐든 할 수 있을 만큼 유명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유명해지고 무언가에 제약을 받는 건 싫다. 마음 편히 영화에 대해 얘기 할 수 있는 씨네라인을 난 사랑하니까. . 결국 내 고민들이 씨네라인 가족을 만나고 '클럽 영화애' 사람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사라지는 걸 보면. . 내 기준. 남의 기준을 떠나서 진짜 심각한 건 정말 정말 기쁜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다시 부모님들한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내가 확실히 글재주가 없긴 없나보다. . 겹겹이 쌓인 머릿 속의 생각들을 이렇게 단순한 글로 표현하는 걸 보면. 그래도 어떤가. . 이미 어설프고 멍청하고 뻔한 나를 그러한 대로 개성 있는 인간이라고 자위하기로 한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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