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얼굴없는 유령
글: 박용하
2002년 07월 17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매우 단순한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단순한 줄거리 외곽을 채워주는 것은 감독 특유의 독특한 캐릭터들이다. 토토로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덩치의 정령들이며 독특한 분위기의 정원, 화면 속 자잘한 곳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만화적인 발상과 화면구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런 것들의 저변에 놓여있는 독특한 캐릭터 들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가오나시, 즉 얼굴없는 유령이 아닐까 싶다.
얼굴없는 유령은 센을 줄곧 쳐다만 본다. 이러한 캐릭터는 최근 일본 만화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며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데 이러한 웃음 뒤에는 왠지 모를 공허가 자리잡게 된다. 아무런 존재감없는 존재. 이러한 존재를 우리는 우리 영화 '여고괴담'에서도 마주치게 된다. 왕따나 은따라는 용어가 흔하게 쓰이는 우리네 학교풍토에서도 그러한 존재들의 존재감없음은 충분히 공감이 가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캐릭터가 암시하는 비참함이다.
1. 말할 수 없음
 |
하지만 글을 아는 것과 말을 하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대부분 살면서 말을 할 줄 안다.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지 않는 한 말이다. 우리는 수화를 포함한 신체언어까지를 '말'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킬때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말하는 존재'라는 정의 안에 포섭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굴없는 유령은 본래 말을 할 줄 모른다. 그리고 말을 하더래도 그 말이 상대에 닿지를 못한다. 그럴때 그 유령이 택한 방법은 매우 처절하다.
그것은 자신이 대화하고 싶은 상대에게 물질을 줌으로써 '종속'적인 관계를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속'의 관계하에서는 우습게도 얼굴없는 유령은 더이상 대화욕구를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는 그를 잡아먹는다.
-이하 스포일러성 내용 있음-
센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표현하는 얼굴없는 유령은 우연히 정령들이 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금을 대량으로 만들어낸다. 그것을 센에게 건내주려고 하지만 센은 자신이 일한 댓가가 아니라며 거절하게 된다. 이름없는 유령은 다른 존재들에게 금을 건네주는데 이러한 건네줌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그는 권력을 맛보고 종속의 희열을 누리며 그들을 이내 동급의 존재자가 아닌 '먹이'로 바라본다. 그리고는 먹 는 다.
2. 다른 자의 목소리를 통해 말함.
다른 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말하는 행위로 문학이나 예술을 제외하고 거론되는 것은 바로 '무속', 즉 '굿'이다. 이 굿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무'가 중재를 하여 그들 사이의 어지러움을 풀어내는 행위전체를 말할 수 있다. 대부분 무는 신과 인간 사이의 이지러진 행위를 좋은 방향으로, 인간이 잘 사는 방향으로 풀어내려고 한다.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그러하겠지만 무도 본시 인간이라는 존재론적인 한계 또한 작용하리라.
이름없는 유령은 정령들을 먹음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들 목소리로 대신 말하는 그는 무와 같은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무와는 다르게 신과 인간간의 조화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무와 인간의 종속을 강력하게 권한다. 그리고 이를 거부하자 폭주하기에 이르른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얼굴없는 유령은 센에게 물질로 종속관계를 맺으려 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말하고 답하는 대화방식의 중요한 전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화라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서 시작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금으로 인해 주와 종의 차이가 지워진 상태에서는 대화라는 것은 가능성으로는 불가요, 필요성에 있어서는 제로이다. 식욕과 성욕의 미묘한 차이에서 보여지듯 대화의 욕구는 종속관계 성립후 증발해버린다. 그러나 얼굴없는 유령은 증발해버린 대화욕구에만 분노를 느끼고 폭주를 할 뿐 자신의 대화방식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끊임없이 사금을 센에게 내밀 뿐이다. 그와 같은 대화방식은 폭력일 뿐이다.
굿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폭력이다. 신과 인간을 잇는 어느 한 줄이 꼬아져 얽히게 되었을때 무는 칼로 그 줄을 내리치는 알렉산더가 아니라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달래는 어머니같은 존재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3. 누군가에게 무엇을
얼굴없는 유령은 결국 힘을 잃는다. 그는 더이상 금을 만들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먹음으로 그 사람 목소리로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조용히 센을 따르고 센이 말하면 그걸 동의하거나 부정함으로 의사표시를 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 전체를 들어다가 들이미는 것도 아니요, 자기와 타인의 경계 전부를 지우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유령과 센은 차이를 인정하고 같은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령은 센을 위해 노동을 한다. 유바바와 쌍동이인 마녀 밑에서 그는 자기손으로 일하는 것을 배우고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을 배운다. 누군가를 위하는 것, 그것은 의사소통의 가장 숭고한 단계이다. 왜냐하면 말을 한다는 것은 욕구를 드러내는 가장 최초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 욕구를 절제하고 말 듣는 이를 위해서 행위하는 것, 그것은 가장 숭고한 일이다.
얼굴없는 유령은 그렇게 사람과 대화를 배워간다. 현대인의 상징이라고 쉽사리 일컬어지는 이 캐릭터가 걸어가는 길은 꽤나 우리에게 흥미롭게 제시된다. 나는 이 캐릭터가 영화내내 걸어가는 길은 말을 배우는 과정의 은유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얼마나 잘못된 말습관이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말을 원한다고 말하며 주먹을 들이밀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말하지 못하게 몇 푼 되지 않는 물질을 들이밀며 유혹하는가.
얼굴 없는 유령은 아마도 결국 말을 배우지 않을까 싶다.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말들을.
This article is from http://www.cinel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