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재미있게는 보았으나

구라파의 영화구라

<영웅> 재미있게는 보았으나 :::

박용하 | 2003년 0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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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은 한 인물 내에서 벌어진 두가지 세계의 대립을 그린 수작이다. 우리는 거기서 나폴레옹같은 인물이면 수많은 사람들의 피도 역사에 당당히 '어쩔 수 없는 희생'이며 '진보를 위한 발걸음'이라고 적히게될 것이라는 영웅주의와 사람에게는 개개인 모두가 소중한 것이라는 민중주의의 충돌이 그려져 있다.

장예모 감독의 신작 '영웅'에 대한 담론은 이토록 문학을 통해서 이미 오래도록 다뤄질만큼 뿌리 깊은 문제이다.

1. 진시황

역사를 다루는 공간이 아니므로 감독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판단은 삼가도록 하자. 이글에서 문제시 삼고 싶은 것은 영화가 주제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가에 대한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특히나 영화전편에 색을 이용한 상징이 넘쳐나고 있음을 볼때 기법을 살펴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진나라는 검은 색이다. 검은 색은 무엇인가? 흔히 말하는 삼원색을 뒤섞었을때 나오는 색이 검은 색이다. 우리는 여기서 중국하면 생각나는 붉은 색이 검은색으로 대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장예모는 중국에 대한 자부심을 모든 색이 종착점인 검은 색으로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게되는 결정, 암살에 관한 진실장면은 흰색이다. 흰색은 어떠한 색도 묻지 않은 상태이기에 순결이나 희생을 상징한다. 그렇지만 흰색은 '백치'와 같은 빈정거림의 뜻도 포함되어있다. 한편으로 이상만을 추구하는 움직임도 흰 색과 짝지워진다.

자, 처음에 무명은 진시황과 만나서 붉은 색의 이야기를 건넨다. 그렇지만 진시황은 그에 대한 화답으로 푸른색의 이야기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진실은 흰색으로 따로 있었으며 모든 진실은 검은색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붉은색/푸른색, 흰색/검은색. 이 영화는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이원론에 입각해있고 좋게 말하면 동양사상에서 종종 보이는 음양사상에 입각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니 그렇지만 그것이 색으로 구체화, 상징화 되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만으로는 깊이가 얕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대체 무엇에 초점을 둔 것인가?

2. 영웅, 유미주의?

우리가 질문을 한방향으로 몰아 단정짓지 않고 여러 방향에서 다가가지 못하는 방법은 장예모감독이라는 존재가 주는 무게감 때문이다. 한국땅에서 이창동영화는 이제 쉽게 평하기 어렵게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홍상수 역시 그렇다. 장예모는 중국만의 보물이 아니다. 그렇다. 속된 말로 하면 '가우가 장난 아니'기 때문에 덤비기 전에 주먹에 기름칠도 해야하는 법이다.

색과 더불어 눈에 띄는 것은 서예, 바둑, 경극과 같은 중국의 것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것들이다. 그것들이 가장 아름답고 두드러지게 잡히게 감독은 수많은 계산 속에 철저하고 숨막하게 화면 속에 배치하였다. 시간과 공간이 자로 잰 듯 절단되어있고 그 틈새에 그 소품들 이 들어차있다. 영화를 보면 숨이 막힌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품은 일방적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영화를 유미주의적이기 까지 하다. 하지만 절대 유미주의적 방식을 따를 뿐 유미주의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형식이 내용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말은 여기서도 맞다. 이 영화는 지나치게 '절대'에 경도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평론가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잠깐 영화에 대한 무수한 오해가 있는데 그것은 이 영화내에서 '절대'를 신봉하는 인물이 진시황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해이다. 무명과 파검 그리고 진시황. 이 세 인물은 모두 '절대'를 신봉하는 인물이다. 무명은 복수를, 파검은 무에 대한 완성을 그리고 진시황은 대륙통일을 절대시한다. 그리고 무명과 진시황은 그 절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파검은 이름자 그대로 자신이 완성한 검을 통해 깨달은 극의를 무명에게 건네주고 이 무명은 자신의 무예처럼 십보내에 다가선 후에 그 극의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자, 그럼 우리 생각해보자. 대체 감독은 이시대에 알레르기 같은 '파시즘'냄새를 풍기는 이 영화에서 누구를 영웅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3. 희생.. 대체 누구를 위한?

서예는 예술이다. 우선 필요한 것은 종이와 필, 그리고 묵이다. 문은 무늬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어떠한 평편한 것에 흠집을 내는 것이 글이라는 것이다. 하얀 바탕의 종이 위에 인간은 검은 색으로 흠집을 내어 글을 완성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시각에 따라 글자를 우선시 하는 사람이 있고 하얀 종이가 만들어내는 여백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다. 전자를 서양식 독법이라 하고 후자를 동양식 독법이라고 하지만, 둘다 그림이 있다는 걸 전제한다는 점에서 완벽히 '흰색'의 편에 있는 이는 없다. 이 글의 처음에 밝힌 약속을 결국 여기서 깰 수 밖에 없다. 내용에 대한 시비로 넘어가는 건 어쩌면 자연스런게 아닐까싶은 초라한 변명이 생각난다.

파검과 무명의 희생, 그리고 굵직한 검은색으로 붉은 피를 거름삼아 쌓아올린 통일.

결국 감독은 기능주의적 국가관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전체를 위해서는 빈민층도 있고 중산층도 있고 부자도 있어야한다는. 그렇지만 희생, 그것이 대체 누구를 위한 희생이란 말인가? 진정 '천하'를 위한 희생인가? 진정 '중국'을 위한 희생인가? 무명이 만약 밭을 갈고 논을 갈며 궁수부대원으로 착출당해 군역을 하는 평범한 진나라 군사였다면 한 획을 긋기 위해 한나라를 짓밟는데 기꺼이 칼을 거꾸로 쥘 수 있었을까? 협이라는 것, 그것이 만약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면, 영웅이 파검이나 무명의 부류라면 나는 그 희생의 대열에 참가하기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