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감독의 <정사>: 구조와 탈구조의 경계를 넘어 :::
라도삼 | 1999년 09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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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의 문제설정: 구조와 탈구조의 경계를 넘어
- 이재용 감독의 '정사'를 중심으로 -
1. 애절할수록 깊어지는 사랑
세상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산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만나 사랑을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만나 하는 사랑 중에 아름답고 귀한 것이 있지만, 허나 그 사랑이 꼭 아름답고 축복 받는 그런 것은 아니다. 만나야 할 사람이 만나 사랑하는 경우야 더 없이 아름다운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야 가슴 아픈 이별로, 때론 상처로 그렇게 서로를 잊어가면서 살아간다. 우리 주변을 감싸는 그 수많은 가슴 아픈 이별의 노래들. 그 노래들이 그토록 쉽게 우릴 흡입하는 것은 어쩌면 아름다운 사랑보다 더 많은 가슴 아픈 사랑과 이별에 우리가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점에서 사랑의 헤게모니는 사랑보다 이별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때론 눈물로, 때론 상처로 생을 살아갈텐데.....' 시간 속에서 혹은 공간 속에서 못 만나는 것이라면 그거야 별 관계없다. 천년의 사랑을 이어온 황장군의 사랑처럼[<은행나무 침대>나 <진용>, 등], 혹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나 <접속>에서 나오는 그런 것처럼 만나야 할 사람들이라면 어차피 만나고, 혹 못 만난다 하더라도 떨어져 있다는 그 사실 자체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만난다면...., 예컨대 그것이 친족이고, 또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는 그런 사람들이라면......, 그런 대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그들의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 도대체 그들은 어디서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만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불행히 되어버리는 사랑. 그 '이루어질 수도, 이루어져서도 안 되는' 불행한 사랑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답은 과연 무엇일까?
2. 불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불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만나면서부터. 영화의 시작은 공항. 애초 오기로 되어있던 사람은 오지 않고 기다리는 두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게 된다. 만나지 말아야 할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나야 할 사람을 사람이 오지 않음으로 해서 만나게 된다. 그로부터 그들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인연의 끈을 하나 둘씩 이어 나가게 된다.
사현(이미숙 분)과 우인(이정재 분). 그들은 그렇게 만났다. 그들 사이에서 그들이 만나서는 안 되는 이유가 되는 사현의 동생이자 우인의 남편이 될 자현이 없는 자리에서 그렇게 만났다. 일찍이 영화아카데미 7기 출신으로 졸업작품인 <호모비디오쿠스>로 유명한 이재용 감독은 그의 첫 작품만큼이나 철저한 갖가지 장치를 통해 이들의 만남이 비극이 될 수밖에 없음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들의 만남이 비극이 될 수 밖에 없는 현대의 문명과 금기,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보편적인 현실원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다.
김사현(이미숙 분). 영화의 시작부터 그녀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가정주부로 묘사된다. 따분하기 그지없는 일상. 그저 보통(?)인 평범한 가정에서 음식을 만들고, 화초에 물 주고, 침대보를 싸고, 설거지하고, 남편을 기다리고, 그러다 잠들고...... 그녀는 어떤 동기에 살기보다는 그저 주어진 일상에 살아갈 뿐이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건 없다. 그저 피곤에 지쳐 잠이 든 남편과 썰렁하기까지 한 커다란 침대. 금속성의 거실과 도시적 공간 배치. 그녀에게 사랑이란 그저 밋밋한 일상에 대한 감정일 뿐, 어떤 것이 사랑인지 모른다. 그저 한 남자의 지극한 구애를 받아 장녀로서의 책임에 의해 교환된, 누구 누구의 마누라 누구 누구의 엄마 일 뿐. 그것이 그녀가 살아가는 뜻 모를 이유다.
그와 대립적인 캐릭터 이 우인(이정재 분). 그는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원래 둘째로 태어났던 그는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 자랐지만, 형의 죽음으로 인해 아버지의 대물림의 전통을 이어받게 되고 그에 따라 철저히 통제되고 억제되는 생활을 한다. 그가 현재 돌을 깍아 대리석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 또한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만들어진 일일 뿐이다. 그의 마음은 항상 어린 시절 추억이 서려있는 브라질 리오의 '말리우스'라는 원시림에 있으며, 그나마 종묘공원 옆에 숲과 호수가 있는 집을 구해 살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는 그렇듯 문명보다는 자연에 친숙해 보인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는 사현의 동생 자현(김민 분)은 화석을 모으는 일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전체적인 이야기의 맥락 상 자연과 가장 친숙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접하는 자연은 단지 대상으로서 자연일 뿐, 그건 다시 문명 속에 재배치되어 전시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있어 자연은 단지 문명 이전의 혼동상태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그 자연은 문명세계로 편입되어야만 질서 지울 때만 의미를 갖는다. 언니의 생일날마다 보내오는 화석처럼. 그로부터 그는 자연으로부터 문명을 이탈시키는 코드를 부여받는다.
사현의 남편 윤준일(송영창 분)은 건축 설계사다. 건축 설계사라는 그의 직업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철저히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문명을 일구는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은 가공되어 처리되어야만 하고, 인공적으로 조화되어야만 한다. 금속성으로 깔끔하게 장식된 그의 집안처럼 모든 것은 가지런히 정리되어야 하고, 그런 문법체계를 가질 때에만 그는 현실의 권력과 권위의 상징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허약한 그의 육체는 그런 구조와 질서 하에서 보전되며, 그로부터 그는 모든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부여받게 된다. 그의 친구이자 설계사무소의 인테리어 유진이 사현의 남편보다 더 문명적인 인공의 현실, 자연의 논리에 배치되는 행위에 대해 억제와 조절을 행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처럼 면밀하게 배치된 인물의 캐릭터 속에 감독은 이제 문명이 행하는 금기와 자연으로부터의 이탈, 그리고 그것이 가져 온 문명과 자연사이에 대치되는 원칙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한다. 한번도 원시적 상태-자연-를 경험하지 못한 여자 사현과 항상 원시를 그리워하는 남자 우인, 그리고 자연을 문명으로 이전시키는 자현과 그 속에서 문명을 건설하는 준일의 대립을 통해서. 사현을 중심으로 연결된 각각의 코드는 사현을 끌어 당긴다. 자연의 원칙과 위반되는 문명의 원칙 속에서 사현은 미묘한 감정 변화를 일으키게 되고, 그런 사현의 모습 속에서 감독은 현대사회의 금기와 자연적인 사랑의 욕망을 대립시킨다. 그렇기에 '정사'(情事)는 한 바람 난 여편네의 얘기가 될 수 없다. 그건 바로 우리의 문명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욕구에 대한 억압체계에 대한 것이며,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이탈된 현대사회의 문명을 보게 된다.
3. 자연과 대립되는 문명 : 인간화의 길
 프로이드(S.Freud)에게 있어 문화는 분명 쾌락원칙을 넘어선 현실원칙에서 구해진다. 그리고 그건 본능적인 성적 에너지에 대한 억압으로부터, 즉 자연의 상태에 대한 이탈로부터 문화는 탄생하게 되었다는 논리다. 훗날 제자였던 라이히(W.Reich)에 의해 배신자라는 오명까지 얻으면서 궁구했던 오이디푸스의 죄의식은 프로이드에게 있어서는 문명을 설명하는 지반이자 근대를 설명하는 원칙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인 라이우스 왕을 죽이고 어머니인 이오테스카를 취한 오이디푸스의 얘기는 신화에 불과한 얘기였다. 신화가 그저 신화라면 그건 있지도 않은 얘기고 그렇다면 프로이드는 있지도 않은 얘길 갖고 현실을 강요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 얘기는 적어도 현실 속에서 검증되어야만 했는데, 그 검증은 스스로를 구조주의 인류학자라 부른 레비스트로스(C.Levy-Strauss)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1908년 벨기에의 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레비스트로스는 자현의 상태와 문화의 상태에 대한 대립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화의 길을 찾게 된다. 증여와 교환의 문명으로 불려진 이 탁월한 연구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자현과 등치되는 보편적 원칙으로서 근친 상간의 금기를 사회적 금기로서 제시하게 되는데, 그에 따르면 사람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주어진 친족의 체계 내에서 취할 수 있는 여자와 취하지 못하는 여자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취할 수 없는 여자와 취할 수 있는 여자의 교환을 통해서 친족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그러한 증여와 교환, 관계를 통해서 금기의 영역을 확정하게 되며, 그 결과 인간은 자연에서 문화의 영역으로 이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근친 상간의 금기로 요약되는 이 간단한 문명화의 논리는 자연과 문화를 구분하는 기본적인 밑저리로, 교환을 매개로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를 은유하게 된다.
그렇다. 친족이 만난다는 것은 금기다. 그것도 사돈네 팔촌도 아니고, 바로 내 밑 동생의 남편이 될 사람이라면 그건 두말할 나위 없다. 그들의 공식적인 첫 만남은 그렇듯 보편적인 집안끼리의 만남, 즉 친족관계에서 시작된다. 장차 동생의 남편이 될 사람. 그로서 그들은 이미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된다. 물론 공간적 여백은 있다. 동생이 우인과 헤어진다는 조건하에. 허나 이 경우 또한 우리네 정리 상, 다시 말해 문명의 원칙에서 봤을 때는 만나지 말아야 한다. 허나 이들은 만난다. 그저 그렇게.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매료되었는지를 설명하기란 힘들다. 건조한 일상과 말없음 속에 눈치로 읽어 내야 하는 속내란 그런 것이다. 어떻게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읽어 낼 수 있겠는가? 감독은 이 순간 '사랑한다'는 말의 표현을 신뢰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소쉬르 이후 구조주의 일반에서 받아들여 온 문제, 즉 언어가 욕구를 속박한다는 문제는 별로 탐탁치 않은 사실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말보다는 서로의 느낌으로, 문명의 기호체계가 아닌 자연의 욕구체계로 그들을 연결시키고자 했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그들은 욕구가 요구되지 않는 현실에서 서로를 욕망하게 된다.
최초의 불행은 비오는 날 우인의 집안에서 행한 첫 번째 키스에서 나타나게 된다. 말보다는 욕구 그 자체로 재현된 행동은 원시의 그것을 닮았다. 그렇기에 그 원시적 행동은 문명의 이탈에서 오는 짜릿한 흥분감 만큼이나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게 된다. 자신의 동생과 결혼할 사람이 자기에게 키스를 하는데 그걸 받아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로부터 우인은 좀 더 도발적으로 사현의 집을 찾게 되고, 어색한 저녁이 끝난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랑을 표현한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주례는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 준비해야 겠지요.'
그런 사현을 우인은 안는다. 그런 우인에게 사현은 다시 말한다.
'날 똑바로 봐요. 내가 누구예요. 자현이 언니예요.'
그랬다. 그들은 우리말 같지도 않은 어색한 제부와 처형사이였다. 어쩌면 친족이라 보기도 힘들지 모르지만, 엄연히 교환체계 내에 있었던 친족관계였다.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그들은 그 속에 편입되어 있었으며, 그렇기에 사랑해선 안 될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인간화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문명의 사회에서 살기를 거부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그런 사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뜻 대로만 되면 오직 좋으랴. 사랑은 그렇게 결혼이라는 범주 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걸. 사랑은 단지 사랑일 뿐, 결혼이란 현실과 책임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건 다만 문명이 만들어 놓은 장치일 뿐. 그 날 밤 비오는 공원에서 사현을 기다린 우인은 열병에 시달리고, 다음 날 찾아 온 사연과 사랑을 나누게 된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사랑이라는 그 열병 하나로. 그들은 그렇게 옷을 벗고 원시의 대지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4. 사랑과 결혼: 친족체계를 넘어
근친혼의 금기. 인류문명에 혼인 - 그러니까 일부 일처제가 도입되고 난 후 사랑은 적어도 책임이 따르는 행위가 되었다. 사랑과 결혼의 방정식. 모든 방정식이 그렇듯 사랑에서 결혼은 상수가 되었고 그 정해진 틀 내에서 답이 정해져야만 정답으로 인정받았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자 현실적인 책임으로서 쾌락과 구분되는 현실원칙이 되었던 것이다.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 문화, 거기에 바로 인간화의 길이 있었던 것이다.
끝까지 프로이드적 전통을 지켰다고 자부하는 라이히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일부 일처제의 강압과 강요된 결혼은 성 에너지의 흐름을 왜곡하게 되고, 그 결과 사회는 점차 금기와 억제의 사회 즉 권위주의 사회로 나간다는 것이다. 문명은 곧 자연으로부터 문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2백년 밖에 안된 자본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약 6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인간의 삶의 구조가 문제라고 말한다. 성적 에너지의 왜곡과 억압의 사실을 끊지 않는 한 권위주의적 체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는 한에 있어 인간은 사회에 속박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문화는 쾌락의 억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성취되지 않는 욕망이 아닌, 성취된 욕망에서 나온다는 것이 라이히의 생각이다.
인간화의 길을 둘러싼 이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은 문명에 대한 관점을 대치시킨다. 금기란 과연 무엇인가? 문화의 출발인가 아니면 왜곡된 문명의 출발인가?
친족의 체계를 넘어 인간화의 길을 포기한 이들의 사랑은 점점 정점으로 향해간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친족의 모임인 제사가 열리던 날 밤, 현대 문명이 낳은 쾌락과 위반의 상징인 오락실에서 이루어진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제사는 친족이 모이는 공간이다. 명목이야 죽은 자의 혼을 위로한다는 것이지만, 실상 그것은 산사람들이 모여 오랜만에 살아가는 얘기와 친족간의 정보-누구 집에 어떤 자식이 태어났는지부터 친족에 대한 확인까지-를 교환함으로써 서로의 존재에 대한 확인하는 공동체의 모임이다. 그렇기에 제사는 어쩌면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바로 그런 친족의 공간에서 사현은 살며시 이탈한다. 그리고 그는 우인이 사는 집 옆 오락실을 찾는다.
다른 한편에서 오락실은 현대 문명이 낳은 오이디푸스다. 수많은 전자 오락 기계들은 현실에선 안 되는 것들, 금기된 것들을 가능케 한다. '여기선 여자가 이기네요'라는 한마디의 대사. 컴퓨터의 세상, 디지털의 공간은 아날로그의 그것과는 다르다. 가상이라는 명목에 온갖 금기와 위반이 가득 차 있으며, 그렇기에 그것은 태어나자마자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오락실은 문명이 일궈 온 비문명의 세계이자 비문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문명의 이면을 상징하게 된다.
친족의 공간에서 빠져 나온 이들은 이 오이디푸스 공간에서 사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주행로를 이탈한 자동차만큼이나 격렬하게 이루어진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오르가즘. 그 때야 비로소 보여주는 우인의 몸. 그것은 준일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건한 육체였다. 준일의 그것이 현실의 문법체계 내에서 결혼이란 형식을 빌어 가부장적 전통을 이어간다면, 우인의 그것은 아직 기표화되지 않는 원시림처럼 그 자체의 힘으로서 사랑을 만들어 간다. 그로부터 그들은 태초의 연인처럼 거리낌 없는 사랑을 확인해가고, 거칠 것 없는 원시의 세계로 달려간다.
도무지 문명의 세계에서 정상인의 모습으로 간주할 수 없는 이들의 사랑에 대해 감독은 갖가지 기표 장치를 통해 그들이 안주할 곳을 암시한다. 그건 어쩌면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이기도 하다. 그들이 태어났던 원래의 자리, 문명을 잉태하기 전 그때의 그 모습. 가공되지 않은 원석들의 절벽과 수양림. 사랑의 열병은 깊어만 가고, 초췌해진 그들의 모습 속에서 마침내 끝나야 할 정점이 다가왔음을 보여준다. 태초의 인간이 그랬듯 문명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구출하는 법. 그 구출이 어떤 것이건 간에 현실은 냉혹하게 이들의 사랑을 반성하도록 만든다.
동생 자현과 긴 전화통화의 흔적을 발견한 사현. 질투심을 느끼고 떠나온 그 자리에서 그녀는 한없는 눈물을 흘린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사랑이 어떻게 이렇게 온다는 말인가? 그리고 도무지 이건 뭔가?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된 자현을 공항에서 맞게 된다.
5. 욕망과 금기의 일상
그렇다. 사람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 관계 속에서 그들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다. 누구 누구의 아들, 누구 누구의 사람. 누구 누구의 뭐. 그리고 그로부터 그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정해진다. 아무리 자본주의라고 해도, 아무리 '기회의 땅'이라 해도 그건 단지 가질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고 경우에만 해당되는 얘기일 뿐이다. 그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는 수많은 도덕과 질서, 관계와 법칙, 윤리와 금기로 뒤덮여 있는 사회다.
실상 이런 세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다소 따분한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아가는 생활. '늘 다니던 길로만 다니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뭔가 새롭게 해볼 염두도 못 내고' 그건 나이가 들면서 더 그렇다. 우인은 말한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얼마나 원하는가가 문제지'. 그래 그럴 수 있다. 너무나 많이 그리고 간절히 원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 우린 '미쳤다'는 얘기를 감수해야 한다.
금기 속에 욕망은 철저히 통제된다. 라깡의 고백처럼 그건 어쩌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충족되어서는 안 되는 '영원한 결핍'일지 모른다. 그 결핍으로부터 일상은 권태와 따분, 나태와 태만을 낳고 무의식의 깊은 저 이면에 '현실'을 불어넣는다. 참고 인내하라. 그건 어쩌면 라이히의 주장처럼 우리가 그런 사회에 익숙해져 가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사현의 일상은 그렇듯 따분함의 연속이었다. 금속성의 인조적인 장식으로 가득찬 집. 그 집에서 그녀가 하는 일이란 지극히 단순한 '주부'로서의 일상이다. 사현의 집을 찾은 우인이 사현의 남편인 준일에게 묻는다.
'지금 행복하십니까?'
'이 사람 취했나. 뜬금 없이 행복은? 행복이 별거야. 저 수족관을 봐. 저게 행복이지. 물결은 잔잔하지, 온도 딱 맞지, 먹을 건 언제든지 계속 공급되고, 아무 걱정 없이 그저 헤엄만 치면 되는 거, 그게 아닌가. 안 그래?'
그렇다. 문명은 그렇게 질서 정연함 속에 행복을 말해 왔다. 문명은 자연의 환경을 인간에 맞게 끊임없이 변화시켜 왔으며, 자연으로부터 무한한 것들을 수탈해 왔다. 그 생산력의 증대정도에 따라 문명의 발전정도는 측정되어 왔으며, 그 문명으로부터 인간은 그 문명의 질서에 맞게 행동하는 법을 배워왔다. 아니 어쩌면 문명은 인간이 그런 환경 속에서만 살수 있도록 길들여 왔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문명이란 수족관처럼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되었다.
따분함과 권태, 일상의 반복을 느끼기엔 남편 준일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직장동료인 유진에게 말한다.
'유진아 나 오늘 여기서 너랑 자고 갈까?'
그런 준일에게 유진은 말한다.
'하루밤 외로움을 달래주고 20년 이상 지켜온 우리의 우정을 버리고 싶지 않아.'
그 역시도 별반 할 일없는 나태와 권태, 성 에너지의 상실로부터 그저 가공된 행복을 느껴가건만, 문명을 배반하진 못한다. 오히려 그는 문명의 건설로부터 억제된 성을 보장받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아내의 외도를 눈치채면서도 그는 애써 감추려 한다. 그가 지켜야 할 것은 사랑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제도였고 가정이었던 것이다.
이 금기로 충만한 일상 속에 어느 날 사랑이 찾아온다. 허나 그 사랑은 너무나 늦게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도저히 해서는 안될 사람과.
'저 어떡하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처음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보같이 이제서야. 어떡하죠 아버지. 저 그 사람 너무 사랑해요. 너무 사랑해서 겁이 나요. 그냥 떠나 보내야 되겠죠. 그래야 되겠죠. 그럴께요. 안 그러면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아프게 되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게 꼭 행복한 건 아니네요. 꼭 같이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갑작스레 쓰러진 아버지의 병실에서 아무 것도 듣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행하는 이 독백은 그런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꼭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 그 사랑이 세상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거라면 몰라도, 문명의 체계를 비판하지 않고 조롱하지 않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들이 만나서 행복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우인의 그 아름다운 사랑 고백에도 사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당신은 사랑한다는 말도 못하죠. 해본 적도 없고, 바보처럼.
당신도 이젠 늙어갈텐데, 아무도 본 척도 안 할거고, 늙어서 죽을 텐데. 몸도 아플거고, 아무도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할거고, 당신 또한 기회가 없을텐데......, 나한테 사랑한다고 해봐요.'
사랑은 사랑에 따른 현실의 책임이 필요한 것을. 같이 살수 없는 데야 어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문명의 세계에서만 지내온 사람이. 결혼은 그렇게 사랑을 막는 상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별은 고한다. 그 오랜 사랑을 끝내고 마침내 모두가 파괴된 채 끝을 맺게 된다. 우인은 자현을 떠나고, 사현 또한 그녀가 보살펴야 하며, 그녀의 존재가 된 남편과 아들, 동생을 떠난다.
6. 문명의 파괴로부터 원시적 자연으로
그렇다. 이 지겨운 게임은 끝나야 했다. 라이히가 뭐라 했든 문명은 어쨌거나 현실원칙이 지배하는 법이니까. 일부 일처제와 근친혼의 금기가 엄연한 현실에서 그들의 사랑은 포기되어야만 했다. 적어도 우인이 자현과 떠나고, 사현 또한 그녀의 집에서 나오는 순간 우린 그렇게 현실과 타협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문제의 이재용 감독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그는 일찍이 영화아카데미 7기 졸업작품인 <호모비디오쿠스>로 유명한 감독이었다. 그는 이 짤막한 단편영화를 통해 TV의 광폭한 영상과 이미지 파괴된 문명을 비판했다.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내 남은 두 눈을 드리겠습니다.'
TV에 매몰된 한 청년의 일상 속에 그는 문명으로 잉태된 현대의 자아를 투영한다. 어느 것 하나도 만져지지 않는 현실. 거기엔 단지 이미지만 넘쳐 난다. 도무지 고정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순간적인 이미지와 영상의 이어짐과 끊어짐. 그 반복 속에 현실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일상의 따분함과 권태로부터 파괴된 자신을 발견한 그는 자신의 마지막 남은 눈을 없애겠다고 선언한다.
어쩌면 현대는, 문명은 그런 파괴된 흔적만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명은 사람을 그렇게 되도록 만든다. 그토록 의미 없이, 그토록 가볍게, 그토록 파괴해버린다. 그렇기에 그는 말한다.
"고대 로마사회에서 모든 노동은 노예에 의존했다. 그들은 노예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노예는 그들에게 있어 환경이었다."
그랬다. 문명은 우리에게 있어 환경이 되었다. 그것은 자연에 등치되는 또 다른 삶의 조건이었다. 그 문명 속에서 우린 그저 수족관의 물고기처럼 헤엄만 치면 되었다. 그것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방식이고, 자연으로부터 이탈된 인간의 죄과였다. 그렇기에 우린 언제나 원시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어머니의 품을 생각하고, 고향을 느낀다. 자연의 따뜻한 향기를 느끼고, 원시 공산제에서 공산제로의 회귀하려 한다. 그리고 마침내 원시로부터 이탈된 후 벌여 온 그 수많은 죄과들에 대해 '엄마'를 부르며 반성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거긴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고향. 그저 지금의 서 있는 자리를 반성하는 푯대가 될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걸 돌려놓고자 했다. 본래 상태로. 문명이 아닌 그저 그렇게 존재했던 그 모습 그대로. 그렇기에 그는 좀더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다. 자연의 것을 문명에 배치시킨 동생 자현으로부터 그 죄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스스로 반성하도록 했고, 파괴하도록 했다. 자연으로부터 문명을 이탈시킨 책임. 어쩌면 감독은 그걸 묻고 있는지 모른다.
더 이상 현실 속에 있을 수 없음을 안 사현은 준일에게 떠나겠다고 말한다. 가부장적 전통에 문명을 건설해 온 준일이 그걸 받아들일 리 없다. 그가 지배하는 것은 애초부터 사랑이 아니라 결혼인 것을. 그는 그 틀을 깨고 싶지 않았고, 그렇기에 말도 안되는 사현의 감정을 애초부터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열병이 어서 끝나길 바랄 뿐. 그러나 그 얘기를 들은 건 불행히도 우인에게 헤어지자는 얘기를 듣고 온 자현이었다.
'그게 언니였어?'
이 충격적인 현실. 자신이 믿고 따랐던 그 사람, 다른 사람도 아닌 언니가 내 결혼할 사람과 사랑을 하다니. 이 더러운 현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 앞에서 자현은 드디어 문명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자신이 생일날마다 선물로 주었던 화석으로, 자현은 문명과 행복의 상징인 수족관을 한걸음에 부셔버린다. 가장 인공적이고, 가장 문법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사랑과 결혼, 행복의 방정식이었던 문명은 그렇게 원시로부터 이탈한 죄과를 치루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떠난다. 그들의 만남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가는 곳 또한 어디를 목적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지금의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 길을 있다면. LA로 갈 것 같은 우인은 '리오'로 발길을 돌린다. 그가 어렸을 적 자랐던 곳. 커다란 호수가 있었고, 해질녁까지 뛰어 놀았던 그곳으로. 그가 LA로 가지 않고 '리오'로 가는 것은 문명에서 문명으로의 이탈이 아니라 문명에서 자연으로의 이탈을 상징하리라. 그리고 그 비행기 안에서 카메라는 잔인하게도 몇 좌석 넘어 사현이 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어쩌라는 얘긴지. 문명에서 자연으로의 회귀하자는 걸 얘기하자는 건지, 문명에 패배한 자연을 보여주자는 건지. 감독은 아무 말이 없고, 그들은 그렇게 떠난다. 그리고 그 자리에 관객만 덩그라니 남게 된다.
'정사'(情事)를 보았던 대다수의 관객이 30대에서 40대 주부라는 것은 그 당시 뉴스거리였다. 3-40대라는 권태와 나른함에 빠져 있던 우리의 수많은 주부들이 바로 정사의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꿈꾸는 것이 정사였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다른 어떤 사회보다 금기로 가득 찬, 그러면서도 전세계에서 제일 많은 여관을 갖고 있는 일탈의 나라. 정상의 힘이 강하면서도 그 힘만큼이나 비정상이 넘쳐 나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어쩌면 그들은 일상에 가득 찬 규범만큼이나 강한 일탈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영화가 끝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위해 백화점에 갔을 거고, 혼자 본 미안한 마음에 남편을 위해 시장에 갔을 것이다. 꿈은 꿈으로서 남는 것. 그렇게 해서 현실은 유지되는 것이다. 세상에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슬플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은 아름답지 않는 고통일 뿐이다. 그 고통에 사회를 포기하자면, 우린 과연 어떤 답을 내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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