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이 있으면 새로움도 있다: 끌로드 를르쉬를 옹호하며 :::
양유창 | 1998년 11월 01일
조회 1420
낡은 주제는 이것이다. 새로운 영화는 무엇인가? 새로운 주제는 이것이다. 이것은 저것과 무엇이 다른가. 대중적인 인기에 비해 그다지 비평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끌로드 를르쉬의 영화들은 분명히 위와 같은 문제점에 관한 좋은 보기가 된다. 말하자면, 끌로드 를르쉬의 영화들은 기존의 프랑스 영화, 헐리우드 영화와 어떻게 다른가, 또 그의 영화의 기고만장할 비정치성은 영화사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여기에서는 그의 작품 중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1966), <낮이 있으면 밤도 있다/Il y a des jours... et des lunes>(1990), <인생 만세/Viva la vie>(1984), <에디뜨와 마르셀/Edith et Marcel>(1983), <20세기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1995), <강도조심/Attention a tout les bandits>(1986) 등의 영화를 중심으로 그의 영화 경향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남과 여>는 단순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부인을 잃은 남자와 남편을 잃은 여자가 서로의 딸과 아들을 매개로 사랑에 빠지고, 과거의 상처에 의해 헤어지지만 결국 다시 만난다는 내용이다. 모노톤의 부드러운 사용과 카레이서인 남자가 그리는 스피디하면서도 건조한 삶, 프란시스 레이의 음악(이후 를르쉬의 모든 영화에서 공동작업),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한 이야기를 자동차 안에서의 독특한 회상방식으로 담아내는 화술과 정갈스런 핸드헬드 카메라 등으로 당시 화제가 되었으며, 를르쉬의 이름을 1966년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자의 명단에 올리기도 했다. 오스카에서도 외국어영화상과 각본상을 수상한 를르쉬는 당시 29세였으며, 이 작품의 촬영과 편집까지 맡고 있다. 그러나, 다분히 감각적으로 영상을 취급하며 내러티브를 교묘히 숨기는 이 작품에 대해 비평가들은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평가는 이후 70년대 초 잠깐동안 진지한 태도를 보일 때마저도 그를 의심하였다. 이후 를르쉬는 평단보다는 흥행성적으로 더 인정받는 감독이었지만, 그의 작품들에는 일반적인 상업성으로 취급하기에는 부적절한 독창적인 시도들이 얽혀 있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얽혀 있는 작품이다. 보름달이 뜨는 날에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어떤 영감을 받으며 이것이 살인사건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고자 한다. 여기에는 로버트 알트만식 다양한 인간군상을 비롯해 고다르처럼 영화 속에 직접 개입하기, 를르쉬 특유의 뮤지컬 등 다양한 기술적, 구조적 장치들이 즐비하다. 영화는 1944년 6월 6일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하고, 곧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 속에서 사랑에 빠진 한쌍의 남녀가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여러 애정 관계들에 개입한다. 그들은 곧 결혼할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평상시로 돌아와 섬머타임제의 실시를 앞둔 하루 동안을 그린다. 섬머타임제로 인해 1시간을 고스란히 잃어버리게 되는 사람들은 신경이 예민해져 있으며, 한 노파가 들려주는 보름달의 전설은 감독이 영화를 보름달과 집단광기의 관계에 관해 추리하도록 만든다. 영화는 이런 선언을 한다. "18분 00초 후 이 남자는 죽을 것이고, 영화는 시,분,초,달이 죽음에 미친 영향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고다르의 <주말>에서 볼 수 있는 수평 트래킹 쇼트와는 반대로, 영화는 늘어선 차들을 긴 달리 아웃으로 찍으면서 한 남자가 거리의 한복판에서 낯선 한 남자를 죽이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 남자들은 제각각 사연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사연들은 보름달과 얽혀 그들을 그 장소로 오도록 했다는 것이 영화가 결말로 치닫기 전까지의 전개이다. 중간에 삽입되는 <남과 여>의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가 를르쉬의 '사랑 만들기'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으며, 시네아스트라 자처하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일종의 나르시시즘과도 같다.
<인생만세> 역시 <낮이 있으면 밤도 있다> 만큼이나 실험적인 영화이다. <남과 여>를 통해 인기를 얻은 장 루이 트랭티냥은 이 작품에서 배우 역할을 하는데, 주로 강사가 되어 일상생활의 '언어'에 대한 강의를 한다. 그는 강의를 통해 스필버그, 고다르의 영화가 가지는 언어적인 특성을 이야기하고, 알파벳만으로도 훌륭한 의사소통 체계를 만들 수 있음을 보이려고 한다. 그것은 희극적인 페이소스를 곁들인 것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알파벳을 음악적인 감각으로 승화시킨 프란시스 레이의 감성은 그것을 영화의 전체 테마로 몰고 가도록 도와준다. 알파벳으로 만든 노래를 배경으로 영화는 일종의 SF적인 소재로 이루어져있다. 고쉐(장 루이 트랭티냥)의 부인이 어느날 사라진다. 그리고, 같은 시각에 거대한 기업의 회장인 페랑이 사라진다. 그들은 3일만에 동시에 나타나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3일이 흘렀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대기업 회장의 행방불명을 특종으로 다룬 매스컴은 이 둘의 관계를 의심하지만 그들은 전혀 안면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날, 이들은 다시 사라지고, 이번에는 3개월 후에 역시 함께 돌아온다. 그들의 머리에는 나란히 천두수술 봉합자국이 있다. 그들은 같은 시간에 물을 찾고, 무엇보다도 물을 많이 마시게 된 것이 큰 변화이다. 그들은 같은 시간에 정반대의 꿈을 꾸는데, 남자가 꾼 꿈은 세상에 태양이 사라져 지구가 냉각되어 소멸되는 꿈이고, 여자가 꾼 꿈은 지구가 타버리는 꿈이다. 그들의 머리에 있는 수술자국은 정밀하게 행해진 것이었으며, 이쯤되자 차츰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들은 외계인에게 잡혀 갔었으며, 그곳은 소년 소녀들이 일렬로 앉아 있는 이상한 세계였고, 그곳에서 수술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외계인을 다시 만나서 메시지를 가지고 오겠다고 말한다. 며칠 후, 그들이 국제적인 관심을 받으며 외계인의 신호를 받아오고, 기자회견장에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회장인 페랑은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미국과 소련에게 무기를 감축할 것을 촉구한다. 다음날 미국은 그 제의를 받아들이고, 이때부터 이 요란스런 일들의 비밀이 밝혀진다. 페랑은 3차대전에 대한 불안감에 말려들었으며, 그 때문에 하나의 커다란 영화를 찍어보겠다고 작정했던 것이다. 그는 미국 대통령이 감독하고 자신이 주연하는 영화를 생각해냈으며, 파트너로 배우의 아내를 지목했다. 실제직업이 배우인 것만큼 그럴싸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수 전문의사와 고쉐부인과 페랑의 입을 맞추는 훈련 등 정밀한 계획 끝에 결국 작전은 멋지게 성공했고, 영화는 이제 큰 줄거리에서 벗어나와 페랑의 소박한 사랑고백을 보여주며 끝난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줄거리를 늘어놓은 이유는, 이 기가막힌 줄거리 자체가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에 대한 간사한 탐구로 요약할 수 있겠지만, 사랑이라는 테마 하나로 줄거리를 이어오던 그동안의 를르쉬 영화에 있어 이 작품은 꽤나 복잡한 플롯과 독특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 를르쉬가 직접 출연하여 자신의 다음 영화를 소개한다. 이 영화는 지루한 인생에서 무엇이 우리가 행복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인지를 물어보는 영화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시작된다. 이만큼 극에 달한 감독의 나르시시즘은 이후 다룰 영화들에서는 그리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나름대로 가치있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에디뜨와 마르셀>과 <20세기 레 미제라블>은 각각 에디뜨 삐아프와 마르셀 세르덩과의 유명한 사랑 일화와 빅톨 위고의 저 유명한 소설을 토대로하여 만든 작품이다. 역시 주된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사랑'이며, 이것은 를르쉬의 모든 영화의 토대이기도 하다. <에디뜨와 마르셀>은 삐아프와 권투선수로서 전후 프랑스의 세계챔피언이 되는 마르셀 세르덩과의 사랑과 삐아프의 노래가사에 나올 법한 한 여자와 포로수용소의 남자 간의 사랑이야기가 엇갈리면서 펼쳐지는 대작으로, 삐아프의 개방적이고 또 그만큼 구속된 사랑과 시골소녀의 닫혀있지만 그만큼 자유로운 또는 익숙한 사랑이 대조적으로 보인다. 장 꼭도가 '사랑'이라는 단어 자체라고 불렀던 에디뜨 삐아프, 그래서 마르셀 세르덩을 그녀의 호메로스라며 질투했던 그 사랑은 어쩌면 너무나 를르쉬적인 테마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 지나치게 표피적인 연출력과 전후 현실을 너무 무시하는 시선은 역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어쨌든 프랑스의 작은 참새인 삐아프는 세르덩을 비행기 사고로 잃고 슬픈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장미빛 인생'에서 '사랑의 찬가'가 울려퍼지는 순간이다. <20세기 레 미제라블> 역시 장발장의 역정을 사랑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전쟁과 참혹의 세기인 20세기를 사는 한 남자(장 폴 벨몽도)는 다중플롯으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극단의 시대 속에서 사랑을 마주대한다. 역시 를르쉬다운 착상은 많은 비평가들이 그 역겨움에 치를 떨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가장 독특한 <레 미제라블>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강도조심>은 를르쉬가 탐정 영화를 시도한 예이다. 뤼팽, 공주, 그리고 모짜르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에서 를르쉬는 범죄행위나 서스펜스가 아닌 뤼팽과 공주의 사랑, 모짜르트와 공주의 사랑 등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는 장 가뱅에 대한 추모로부터 시작한다. 1984년 장 가뱅은 사망했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장 가뱅 없이 누가 탐정물을 할까?" 그리고, 이제부터 를르쉬가 그것을 한다. 뤼팽은 감옥에 가기 전 딸 마리를 공주로 키워달라고 기숙사에 부탁한다. 그리고 10년간에 걸친 감옥과 기숙사간의 편지가 계속된다. 이 장면은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아름답게 보여주도록 효과적으로 만들어졌고, 이후 드라마가 탐정물의 전형을 따르면서도 사랑의 테마가 빠지지 않도록 주의시키는 역할을 했다. 공주는 기숙사에서 만난 앙뜨완느와 사랑에 빠지지만, 공주를 사랑하는 건달 모짜르트는 공주를 위해 뤼팽을 탈옥시킨다. <은행털이와 아빠와 나>, <귀여운 여도적> 등이 생각나게 하는 이 영화의 미덕은 다른 를르쉬 영화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지만, 전화 세 통으로 뤼팽을 탈옥시키는 황당함이나 줌 렌즈의 빈번한 사용 등은 를르쉬 영화임을 짐작케 해준다. 아마도 이 영화의 제목은 이러한 장르를 마음대로 차용한 감독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 같다. 강도조심!
사랑은 새로움을 담아줄 수 있는가? 현실마저 무시하고 담아내는 사랑은 과연 기존의 관습적인 장르들을 새롭게 쓰도록 만들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지극히 자의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할 지도 모른다. 스스로에 의해 정의되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용법은 그토록 오만한 감독에 의해 (아마도 사생활의 영향력 하에서) 내키는대로 해석되어져 왔고, 마음껏 자유를 누려왔다. <남과 여>의 장 루이 트랭티냥과 야누크 예메가 헤드라이트를 깜박이며 다시 만날 때, <에디뜨와 마르셀>의 삐아프와 세르덩이 남몰래 전화로 노래를 주고받을 때, 그리고 <낮이 있으면 밤도 있다>와 <인생 만세>에서 각종 영화들로부터 영향받은 의미 깊은 시도들이 서로 조화롭게 이어지지 않을 때, 사랑은 구원의 마리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현대를 무대로 하는 를르쉬 영화 속에서 현대사를 다시 쓰도록 종용한다. 전쟁과 고통으로 얼룩진 현대는 그의 영화에서는 의도적으로 지극히 낙천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감상주의적인 영화 만들기 안에 녹아들게 된 것인데, 때로는 관객을 알 수 없는 분노와 매혹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으면서도 일정의 일관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사에 있어서 이러한 경향을 갖는 감독은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를르쉬 영화의 뮤지컬적 특성이 그를 헐리우드의 뮤지컬 영화들과 견주어 보게도 만들지만, 헐리우드(혹은 일본영화)에 있어 뮤지컬은 감독이 아닌 회사와 스타가 이끌어간 것이었다. 그렇다고해서 그를 고다르에 필적할 만한 작가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그 일관적인 작품성향과 독창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성공 때문인지 비평적으로 무시되어 왔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그는 누벨바그 작가들이 한창 성숙기에 이를 무렵 갑작스레 등장하였으며, 누벨바그 혹은 루이 말 적인 시선과도 다른 길을 걸었지만, 또 프랑소와 트뤼포나 에릭 로메처럼 개인적인 이야기를 영화적인 시도와 결합시키는 것이 아닌 단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영화적인 시도를 무시하지 않는 작품을 택했지만, 그 역시 당시 선배들이 일구어왔던 새로운 전통을 계승하려 애썼으며, 이를 위해 고다르, 트뤼포 혹은 로메 적인 것 - 그는 67년 고다르, 레네, 바르다 등과 함께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진/Loin du Vietnam>을 공동감독하기도 한다 - 을 헐리우드의 시스템적인 영화들과 결합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낮이 있으면 밤도 있다>, <인생 만세>, <강도조심>과 같이 때로는 심오하면서도 때로는 지나치게 가벼운 작품군이었고, 이것은 그의 다양한 필모그래피의 일면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사랑이 있는 삶을 원했으며, 사랑이 있는 영화를 원했다. 사랑이라는 다분히 프랑스적인 테마는 그의 손에서 더욱 프랑스적으로 변모해왔으며, 그것은 그를 바람둥이가 아닌 사랑의 시인으로 부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는 <남과 여>는 여전히 얼마나 시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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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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