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기말과 세기초를 종횡하는 이미지들은 세계의 외형과 실재에 상이한 모습들로 마치 융단폭격처럼 투하되었다. 시각 체계를 구성하고 향유하는 존재들의 세계관은 이 이미지들의 무한한 방사(radiation) 속에서 반복하여 나타나고 사라졌다. 개별적인 존재(혹은 존재들)의 유토피아는 '영상 문화의 시대'나 '시각 문화 체제(visual culture regime)'라는 하나의 어휘로 수렴되지 않는 이미지들의 군집들과 부대끼는 가운데, 기대와 동경, 열망의 담론으로 수놓아졌다. 이 가운데에서 어떤 이미지들, 혹은 시각 장치들은 우리를 배반하고 허무와 절망의 황량한 풍경을 투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엇갈린 전망들은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기존의 앎의 양식을 혼란에 몰아넣는다. 새로운 이미지 생산 양식이 출현하고, 이와 더불어 체험하는 쾌락의 양상, 혹은 쾌락에 대한 환상이 변모하는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고 이에 적합한 도해(scheme)를 작성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이것은 단지 표상의 생산이나 인식론적 판단의 불가능성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지 체제의 지각 변동은 이제 존재론의 수준으로 격상되고, 나아가서는 신체의 내밀한 육질(肉質)과 기관(器官: organ)이라는 불가침의 영역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존재의 시공간 자체는 물론 이러한 시공간을 보고 느끼는 감관(感官)의 속성에 대해서도 쉽사리 단언할 수 없게 되었다.

인식에 대한 회의주의와 존재에 대한 불안이 포화 상태에 이르는 가운데 세기말과 세기초의 시공간에 배치되어 우리에게 희망의 불꽃을 점화하는 촉매제는 테크놀로지이다. 테크놀로지를 둘러싼 환상은 그것이 단지 이미지들의 생산으로써 시공간의 국지적(local) 변동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물질적 조건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테크놀로지는 이를 즐기는 존재들의 경험과 사유를 강화하고, 그것은 전지구적(global)인 시공간을 밀도 있게 재조직하면서 이 시대의 탁월한 담론 견인체(牽引體: attractor)로 기능한다. 우리의 다양한 시선들은 어제와 오늘의 영화를 둘러싼 물적 토대(텔레비전, 가상 현실, 비디오, 컴퓨터 그래픽스 등)의 언저리로 소환되어, 세계의 시계와 지도를 새로이 제작하도록 요청받는 것이다.

이 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동시대의 이미지들에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주석을 기입해 왔다. 시뮬라크르는 상이한 테크놀로지들이 생산해 내는 이미지에 대한 매혹과 불안을 모두 접어 넣을 수 있는 텅 빈 격자(grid)로서의 개념이었다. 이미지를 설명하는 사전에 이 개념을 등재시킨 매체는 텔레비전이었다. 그것은 생활 환경의 지배적 이미지로서 스스로의 위상을 공고히 하면서,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매체였던 영화에까지 잠입하였다. 그 결과 영화 이미지의 경관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이행하고 있다.

2. '시뮬라크르'의 전도사 장 보드리아르(Jean Baudrilliard)가 줄기차게 설파하는 묵시록은 지시대상(le référent)의 소멸이다. 우리는 실재와의 접촉에 대한 기억을 더 이상 떠올릴 수 없다. 우리는 모델(model)과 복사물(copy)을 구별할 수 있는 준거를 상실한 채, 부유하는 기호들(signs) 속에서 일종의 무중력 상태에 빠진다. 우리를 둘러싼 미디어 이미지들이 과연 실재에 대한 기억인지, 실재라는 화폐의 '위조 지폐'일 따름인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보드리야르가 제시하는 시뮬라크르는, 실재하는 대상과 기호간의 관계는 비결정적(indeterminate)이라는 규정을 넘어선다. 시뮬라크르가 일으키는 '내파(implosion)' 효과는 현대 사회의 이미지 복제품들이 사실상 실재는 거세되었다는 것을 은폐하고 있고, 실재의 부재만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텅 빈 기호로 변모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것은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라는 주체와 대상간의 공간적 분리(혹은 이 분리에 대한 은유)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는 상태, 이미지로 세계의 표면과 신체의 거죽을 뒤덮는 미디어의 지배적 권능을 의미한다. 가상과 실재의 분리는 실재의 객관성을 지탱하던 의미적 내용물을 "미디어의 유일한 지배적인 형태 속으로 흡수"한다.²⁾ 기호의 발원지인 미디어가 실재의 에너지를 빨아들여서 미디어와 네트워크라는 모세 혈관으로 순환시킴에 따라, 이미지는 어떤 것을 재현(représentation)한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재현은 "기호와 실재의 등가 원칙"³⁾과 실재로부터 기호가 연역된다는 공리를 모태로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디어에서 발산하는 이미지 기호는 더 이상 기호가 실재의 가치를 담보할 수 없으며, 실재의 윤곽과 의미를 추상화하는 논리적 관계가 전도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미지는 무언가를 닮으려 하지 않은 채, 스스로 자신의 실재성을 뽐내고, 나아가서는 실재 자체의 존재 가치마저도 폐기해 버린다. 즉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⁴⁾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이미지 기호가 의미와 실재에 가하는 테러리즘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매체는 텔레비전이다. 보드리야르에게 텔레비전은 다른 미디어나 기호적 재현 양식이 설파했던 진실의 헤게모니를 전복하고, 마침내는 시뮬라크르의 전제 정치를 소리 없이 행사하는 탁월한 미디어이다. 그는 2차 대전 이후부터 세기말에 이르기까지 생활 영역 도처에 펼쳐진 텔레비전의 전지성(全知性)은 산업 자본주의에서 소비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을 가속화한 동인(動因)이라고 설명한다. 새롭게 넓어진 시장 가치를 구현하고 구매력 있는 대중을 양산하기 위해서, 텔레비전은 계급과 지위를 초월한 매체로 가정 공간에 스며들어야 한다. 그 결과 텔레비전이 없는 사회적 개체들은 정치적 시민권과 경제적 권리가 없는 자의 영역으로 고립된다. 즉 텔레비전은 "시민권 증서"이자 "인정, 통합, 사회적 합법성의 담보물"로서, 시청이라는 기능 이전에 "증거의 기능"⁵⁾을 행사한다. 노동 계급이건 중산층 이상이건 사회적 인증을 부여받기 위해 각 가정은 텔레비전을 최대한 가까운 곳에, 모든 가족이 어울려 볼 수 있도록 최대한 중심적으로는 물론, 휴식 때나 가사 노동 시간에도 언제든지 채널을 선택할 수 있도록 탈중심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이처럼 텔레비전은 시청 주체와의 친밀성과 인접성(congruity)으로써 시뮬라크르 방송을 개국한다. 이것은 주거 공간의 재배치로부터 출발하여, 재화의 구매와 물건의 선택 과정에서 요구되는 사용 가치에 대한 감식안을 저하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각 경제 주체의 활동 공간을 축소하는 것과 병치된다. 왜냐하면 텔레비전은 각종 상품에 대한 정보와 메시지를 연속적으로 전송하는 과정에서 시청자들을 브라운관에 고정시키고 합리적 경제 활동의 시간을 잠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간의 축소는 시간의 함수로 재배열된다. 텔레비전이 상품으로부터 추출해 낸 온갖 시뮬라크르들은 그 자체로는 잡다하고 이질적이지만, 시청 시간 동안에는 전파의 연속적 흐름 속에 등질적으로 약호화되어 시청자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물리적으로 볼 때 소비자/시청자들의 명백한 수동성은 신체적 감각의 감퇴를 유발하고, 활동의 총체성은 급격히 압축되어 시청 시간이라는 정보로 환원되는 결과, "시간의 정량화(定量化)"로 귀결된다.⁶⁾

미디어와 신체의 인접성을 바탕으로 가정 공간과 노동 공간의 위상을 변화시키는 사전 정지 작업을 거친 후, 텔레비전은 "진실인 것은 텔레비전이며, 진실을 만든 것은 텔레비전"이라는 가설을 증명한다. 텔레비전은 이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실재의 경험적 시공간을 소거시키고 인공적인 세계를 실재의 세계라고 설득하는 시뮬라크르 보관소가 된다. 아우슈비츠 학살 다큐멘터리처럼 잔혹한 역사적 비극을 조작한 인위적 기억이건, 일상사의 자연스러움을 흉내내는 몰래 카메라(candid camera)건, 텔레비전 수상기는 그 자체의 현존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은 수상기에 나타나는 이미지에 공감하고 그것을 집단적 기억/현실로 받아들이는 침묵하는 시청자들의 존재만을 유일한 현실로 공인할 뿐, 이미지 바깥의 어떤 현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재의 논리, 진리의 설득력을 제외하고 텔레비전은 "아무 것도 환기하지 않는다. 단지 화면만을 나타내고, 하나의 화면일 따름이거나, 당신의 머릿속에 즉각적으로 축소된 말단부다. 당신이 화면이고, 텔레비전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⁷⁾『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부터 비치던 맥루한(Marshall Mcluhan)적 광휘(光輝)를 더욱 가시적으로 표현한 이 구절에서 보드리야르는, 시청자 주체가 곧 텔레비전의 일부, 즉 텔레비전 공중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브라운관이나 다름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실재의 유효성과 경험의 다층성을 판별할 수 있는 비판적 지각과 진실의 준거를 상실한 채, 주사선이 주파하는 전기적 신호의 궤적에 따라 이미지를 보고, 자신의 의식을 노출하며, 뇌수(腦髓)를 통해 즉각적 반응을 산출할 뿐이다.

이처럼 텔레비전은 실재의 부재만을 전언하고 자신만으로 세계를 통어(通御)하는 데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시뮬라크르의 권능을 긍정함으로써, 사회를 "일망 감시 체제"의 분산적 네트워크로 통제하고, 판단 주체를 탈중심화한다. 탈중심화의 단계는 텔레비전 미디어 이후 달라진 미디어의 위상에서 그 첫 신호를 보낸다. 미디어는 더 이상 자연적 자극과 인간의 감각을 소통시키고, 인간의 감각을 확장함으로써 자연적 지각을 표현하는 주체의 양식을 변형하는 매개항이 아니다. 실재로부터 기호를 파생하는 미디어의 기능은 전자와 후자의 범주가 엄밀했던 재현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디어는 시뮬라크르 속으로 흡입될 운명에 처한 실재들, 즉 환상, 노동, 역사의 목록에 포함된다. 이러한 상황을 따르면, 미디어가 수행하는 매개의 기능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이는 미디어 자체가 미디어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내용물과 메시지가 미디어 속에서 기화되어 버린 후, 그러한 자체로서의 미디어 자체가 기화된다"⁸⁾ 텔레비전 미디어가 실재와 흡착되는 현상, 즉 "매체와 실재가 . . .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단 하나의 성운(constellation)"⁹⁾이 된 순간, 주체 자신도 브라운관의 프레임 내부에 구획되어 버린다. 폭넓은 의미에서 볼 때 미디어는 주체와 대상의 거리와 간격을 입증하는 물적 실재였으며, 주체가 대상을 변형하고 이로부터 미학적 감흥을 창출할 때 호출하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미디어는 대상을 향해 자아를 접근시킴으로써 자연적 우발성과 세계의 변화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고 통합하기도 한다. 영화 이전의 미디어는 이 두 가지 능력, 즉 수단으로서의 미디어와 행위자(agency) 서의 미디어가 길항(拮抗) 관계를 이루는 가운데, 주체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시간과 불변성을 보증하는 공간을 주조해 왔다. 그런데 텔레비전 이후의 미디어, 특히 입체 영상은 이 두 능력의 균형을 파괴하고 행위자로서의 미디어가 지닌 권능을 증강시킨다. 그 결과 시뮬라크르의 집적과 확장으로 인한 깊이의 소멸은 "미학의 종말, 곧 매체의 승리"¹⁰⁾를 확인하며, 매체는 그 역할을 다하고 승리를 자인하는 순간 스스로 사라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1950년대 방송 시작 이후, 이러한 텔레비전 시뮬라크르는 영화의 주변부에 출몰하면서 프레임으로 침투하고 사라지는 비가시적 얼룩(spot)과도 같았다. 텔레비전은 2차 대전 이후의 산업 영역 전반에 관여하면서 노동과 여가의 엄밀한 분기점을 침해하고, 소비 사회와 문화 산업의 물적 토대를 이루면서 영화 산업과 긴밀한 관계를 이루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90년대 이후 텔레비전 이미지가 영화 이미지의 생성 효과 내부로 삽입되면서, 영화적 시공간 안에는 이전보다 더욱 가시적인 균열과 중첩이 발생하고 있다. 이를 피터 위어(Peter Weir)의 『트루먼 쇼』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3. 『트루먼 쇼』는 텔레비전과의 접촉에서 생성된 보드리야르의 견해가 헐리우드에서 대중적 스토리라인과 이미지로 변환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¹¹⁾ 여기에는 존재가 경험하는 노동과 가정, 여가 공간이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투명한 그물망"에 포획되어 인력과 자본의 집적 및 순환을 촉진한다는 포스트포드주의적 가정과, 이러한 포스트포드주의의 봉인을 풀면 자아의 "지향적" 의식이 객관적 실재의 풍부함을 직접적으로 향유할 수 있다는 현상학적 가정이 중첩되어 있다. 전자는 트루먼이 자신의 일상사가 낱낱이 텔레비전 시청자들의 표적이 되어 왔음을 우연찮게 깨닫기 전에는 결코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없는 극사실의 세계이며, 후자는 그러한 극사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깨닫는 경험적 세계의 무한한 지평이다. 실재보다 더욱 실재적인 극사실의 세계인 "버뱅크 스튜디오(Burbank Studio) = 시헤븐(Seaheaven)"에서 정보의 흐름과 재화의 유통, 소비와 여가 행위는 가장 이상적인 흐름으로 축적되어 트루먼의 생활 영역 언저리를 회전한다. 트루먼을 둘러싼 모든 것이 광고이며 상품, 일종의 페이 퍼 뷰(pay per view)체계임을 우리는 영화 중 쇼의 제작자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 Ed Harris)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다.¹²⁾ 트루먼이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자각하기 이전까지 이 모든 순환 과정에는 아무런 장애도 발생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릴 적부터 소중히 여겨 온 잔디깎이도 폐기하고 나면 신제품으로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다. 상품의 대체는 곧 재화뿐만 아니라 용역의 대체이기도 하다. 트루먼의 이웃들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고, 또 다른 이웃과 동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버뱅크 스튜디오는 이 모든 과정을 24시간 내에 압축시킴으로써 근대적 자본이 추구했던 시간적 확장이 아닌, 시간의 응축을 구현한다. 또한 근대적 산업 공간이 아닌 휴양지 캘리포니아에 거대 스튜디오를 구축하고 모든 형태의 산업을 한꺼번에 옮겨 놓음으로써 공간적 압축 또한 표명한다. 영화는 부지불식간에 30 여 년간 이 거대한 쇼의 주인공을 맡아 온 트루먼 버벅(Truman Burbuck)이 버뱅크 스튜디오를 탈출하는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포스트포디즘의 세계, 즉 하나이자 다수인 브라운관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후자의 세계를 은폐하는 거대한 막(membrance)이었음을 드러낸다.

포스트포디즘을 영속화하는 모든 주체들을 응집한 브라운관으로서의 세계는 이야기하기(storytelling)의 수준을 넘어 영화적 몽타쥬의 기저로까지 송출된다. 그 결과 『트루먼 쇼』는 영화적 이미지의 투사(projection)와 관람 행위가 일련의 방송(broadcasting) 기술과 시청 행위로 치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트루먼 쇼』에는 영화 이미지가 내러티브의 감정적 동선과 공간적 연속성 속으로 관객을 봉합하는 시점 쇼트(point-of-view shot)가 배제되어 있다. 일차적으로 이러한 쇼트의 권리를 강탈당한 자는 트루먼이다. 그가 부인을 보건, 직장 동료와 정원을 보건간에 그는 실재하는 타자의 시선을 통해 자아의 안정감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가 대상을 향해 시선을 보내는 장면의 쇼트는 곧이어 상대편의 시선이 아닌 텔레비전 카메라의 응시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에서 발생하는 경험적 장에서 일어나는 자아와 타자간의 상호 주관적 관계도, 자아의 동일성을 향해 타자의 존재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관계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트루먼의 24시간을 완성하는 쇼트가 사실은 그가 "트루먼 쇼"의 시청자들에게 보여지는 양상을 보증할 뿐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트루먼 쇼』의 관객은 TV의 시청 과정과 동일화되는 일련의 쇼트 구축 과정을 통해 트루먼 버벅의 존재를 파악하는 눈길을 거세당하게 된다. 따라서 시점 쇼트를 강탈당한 또 하나의 주체는 사실상 버뱅크 스튜디오라는 거대한 인간사 박물관(人間史 博物館)에 눈길을 던지는 일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우리들(익명의 시청자들)"이다. (트루먼의 하루 일과가 종영(終映)될 때마저도 제작진과 시청자들은 TV를 보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 응시의 이중적 통제를 통해 트루먼과 시청자(관객)의 신체는 버뱅크 스튜디오가 관할하는 이미지의 조정과 제작 과정을 접수받는 "단말기 terminal"로 프로그래밍된다.¹³⁾

이러한 이미지의 흐름은 텔레비전이란 일련의 "조작적 이미지"라는 보드리야르의 가설과 공명함으로써, 트루먼을 둘러싼 세계가 그와는 독립적인 텅 빈 기호이자 정보의 영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감을 고양하는 강렬하고 연속적인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일어나는 이미지의 가공 과정은 시점 쇼트의 원리를 전도시키는 것 이외에도, 피사체의 외관을 굴절시키는 광각 렌즈 화면, 플라잉 캠(flying cam) 촬영을 통한 세계의 평온하고 안정적인 외관을 조망하는 구축 쇼트의 사용 등, 세밀한 변형의 테크닉을 통해 이미지들을 봉합한다. 이러한 봉합을 통해 우리는 트루먼 버벅을 둘러싼 물질적 실재와 외부적 경관이 사실은 도처에 산재한 침묵의 대중들에게 적나라하게 공개되는 비물질적 이미지들의 연쇄임을 알 수 있지만, 트루먼 자신은 이를 모르고 있다. 이 이미지들은 트루먼 주변을 회전하는 효과로서의 기능 이외에는 그 바깥이나 이면에 아무 것도 없지만, 트루먼에게는 30여 년 동안 신뢰해 왔던 세계의 평온하고 반복적인 질서로 내면화되어 왔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버벅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기이한 낌새를 느끼고 상궤를 벗어난 각종 접촉, 예를 들어 대로 한복판에서 차를 멈추는 행위 등을 행할 때 그를 둘러싼 공간은 갑작스럽게 변모되고, 주변인들의 시선은 의혹과 감시의 눈초리로 바뀐다. 그들이 역할에서 이탈되었을 때 느끼는 유일한 반응은 자신들이 '무효화'되었다는 데서 느끼는 당혹감인 것이다)

4.『트루먼 쇼』는 텔레비전 미디어가 원격 현존(telepresence)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자본과 생활, 기억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이 시대에 대한 우화(寓話)다. 이러한 이야기 기술은 곧 영화 이미지 내부로 스며든 텔레비전 이미지가 촉발하는 상호 텍스트적 이미지의 교환과 혼합된다. 이를 통해 이 영화는 실제로 살아가는 경험적 자기장이라 믿고 있던 우리의 일상적 실재가 사실은 모사(模寫)의 원리라는 또 다른 자극(磁極)에 견인되어 왔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 결과 텔레비전 테크놀로지의 현존은 곧 일상성이라는 평범함이 일깨우는 숭고(sublime)의 현존이 된다.

이러한 숭고는 주체들에게 어떻게 쾌감을 일으키는가? 보드리야르는 텔레비전 이후의 미디어에 배열되는 시뮬라크르의 속성을 일종의 "투명성(transparency)"으로 파악한다. 미디어 공간에서 이전까지는 사적 영역이란 보증을 받으며 비가시성과 음영의 베일 속에 가려 있던 것들, 특히 가정 생활의 모든 세부 사항들은 공적 영역으로 외연화된다. 이는 단순한 가시화를 넘어서, 사적 영역을 지배하던 은폐의 논리를 철폐한다는 점에서 탈은폐의 현상이다. "모든 우주가 당신의 가정에 설치된 화면상에 임의적으로 전개된다. . . . 이 모든 것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최소한의 분리에 의해 형식적으로나마 보존되던 장면을 폭발시킨다"¹⁴⁾ 탈은폐의 논리 덕택에 우리는 텔레비전의 평면 화면 '내부'에 무엇이 비추는지를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다. 시각적 지각의 차원에서 볼 때 텔레비전의 화면은 놀라울 정도로 투명하고 놀라울 정도로 입체적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그 내부에는 어떤 깊이와 심도도 없다. 예전에 은폐의 공간이 활성화하던 환상과 상징, 은유의 논리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의 거울이 조각남에 따라 주체를 형성하는 데 필수적이었던 세계와의 거리는 소거되고, 내면성과 의미의 장도 붕괴된다. 자신이 보고 있는 재현의 격자 바깥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발견할 열정도,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의 적나라한 가시성 속에 증발해 버린다. 이러한 열정이 붕괴되고 나면 주체는 이제 정보의 현란함과 무심함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화면, 모든 영향력의 네트워크에 적합한 조정 센터"¹⁵⁾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러한 투명성의 힘은 시뮬라크르가 파괴하는 유사성과 재현의 범주 이전의 영역과 맞닿아 있다. 그는 텔레비전 이미지가 실재의 깊이를 소멸하는 힘, 실재의 온기(溫氣)가 거세된 '차가운 유혹'의 힘은 "빛과 그림자, 점, 사건의 유희"¹⁶⁾에서 나온다는 전제하에, 소논문 「눈속임 회화」와 「악의 투명성("Transparency of the Evil")」에서 고전적인 응시 행위에 부여되는 시각적 거리감의 상실을 대체할 '촉감'에 대해 언급한다. "마치 우리가 그것을 만질 수 있고 잡을 수 있기나 한 것처럼" 나타나는 촉감은 직접적으로 실재를 만짐으로써 느끼는 유기적 감각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르네상스 이후로 서구의 시각적 에피스테메를 지배해 온 원근법에서 촉진해 온 환상, 소실점 속으로 수렴되는 주체의 응시 공간에서 창출되는 입체적 실재감이 소멸된 자리를 반어적으로 대체한다.¹⁷⁾ 따라서 그는 눈속임 회화의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모사할 때의 즐거움은 "예전에 경험한 강렬한 감각, 현실 세계의 생산 양식 이전에 존재하는 삶에 대한 강렬한 감각"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시지각적 논리를 따르면, 텔레비전 수용자들은 기존의 이차원적 표상이 지닌 입체감과 부피감 대신 사물이 이미지의 표면상에서 유영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텔레비전에서 투과되는 빛의 주사선은 실재하는 빛과 사물이 엮어내는 입체성의 광원이 아니라 오직 외양의 과도함을 흉내내는 인공적인 빛만을 방사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텔레비전과 접촉하는 주체의 시지각은 갈수록 비대해지며, 이 지각의 불균형은 만질 수 있다는 환각으로 인해 대체되어야 한다. 전자는 상궤를 벗어난 듯한 이미지의 곡률(曲律)과 왜상(歪象)으로 나타나며, 후자는 실제 거리감을 일소하는 사물들의 거짓된 현존을 통해 나타난다. 이 모두를 통해 촉발되는 촉감은 곧 시청자들의 물리적 경험의 원환(圓環)을 이지러지게 하는 것을 담보로 내거는 대가(對價)이다. 예전에 경험한 것과 같은 어떤 느낌, 그렇지만 그 뒤에는 아무 것도 볼 것이 없기 때문에 이전에 느꼈던 충일한 부피감과 존재감을 느낄 수 없는 감각만이 고양된다.

텔레비전 이미지의 편재성이 행사하는 역량 또한 닮음의 원리 이전의 차원, 즉 이미지의 물질성과 구체성이 관객(그리고 등장 인물)의 경험과 지각에 미치는 첫 단계다. 이 점에 착안하면서 우리는『트루먼 쇼』의 한 장면을 재생해 볼 수 있다.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트루먼 쇼 30주년 하이라이트" 예고편 장면에서 관객은 화면을 향해 무언가를 연신 중얼거리는 트루먼의 모습을 스캔 화면으로 접할 수 있다. 오프닝 크레딧(opening credit)에도 등장하는 이 장면은 이 영화의 이미지가 텔레비전 수상기 네트워크가 설치되었음을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신호이자 열쇠(cue)가 된다. 이 열쇠를 통해 관객은 트루먼을 둘러싼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세트임을 깨닫고 트루먼(그리고 그의 시청자)의 입장에 동일화하게 된다. 이러한 동일화는 내러티브의 층위 이전에 영화의 프레임과 텔레비전 이미지 프레임의 이질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와 같은 추론을 우리는 트루먼의 기억 부재가 드러나는 시점으로 연장시킬 수 있다. 이 시점은 지금은 사라진 여인 실비아(Sylvia)와의 첫 키스, 그 입맞춤에서 오는 강렬함이 환상 속에서 환기되는 시퀀스다. 실비아를 향한 트루먼의 응시는 처음으로 쇼트-역쇼트(shot-reverse shot)의 원리에 의해 구축된다. 그 결과 관객은 이전까지 보아 왔던 이미지가 사실은 영화적 이미지의 자연스러운 봉합과 다른 메커니즘임을 깨닫는다.¹⁸⁾ 실비아가 가족들(그들도 물론 역할 분담을 맡은 부품, 분업화된 용역일 따름이다)이 사라진 그날 밤, "이 모든 것은 TV 세트야"라고 절망적으로 외칠 때, 화면은 다시 관음적 마스킹(masking) 쇼트로 관객의 눈을 둘러싼다. 물론 여기서 관객은 트루먼의 환상마저도 텔레비전 매커니즘 내부에 용해되어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이를 뒤집어 보면 좀 더 확대된 해석이 가능하다. 시헤븐의 허구가 드러나는 지점은 영화적 이미지와 텔레비전 조작 기술의 경계가 뒤섞이고(blurring), 전자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엿보기 식의 화면이나 감시적 조망이 후반부로 갈수록 줄어드는 지점이다. 그 결과 그가 물에 대한 공포(실재의 접촉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인공 폭풍의 고난을 헤치면서 시헤븐의 인공적 실체와 대면할 때, 관객의 시지각은 자신을 흥분과 몰입으로 몰아 넣었던 거대한 눈속임의 외양과 접하게 된다. 3차원적 입체감으로 관객의 눈을 자극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비정상적인 곡률(曲律)로 왜곡된 인공 하늘이라는 벽이 트루먼 앞에 위풍당당하게 놓여져 있는 것이다.

트루먼이 행하는 "기억의 창조적 지리학", 포스트모던 시대에 실체와 기억을 구성하는 과정은 이처럼 이질적인 대상과 질료들이 각각의 상이함을 유지하면서 총체성을 이루는 위험한 긴장과 모순의 관계, 일종의 알레고리 형성 과정이다.

5. 보드리야르의 논의는 미디어가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는 신체의 연장이라는 맥루한적 가설에서 출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촉감의 미혹(迷惑)과 투명성을 텔레비전 이미지의 감화력으로 간파한다. 하지만 이러한 직관은 논리 전개 과정에서 시뮬라크르를 나타내는 가장 지배적인 논리, 즉 시뮬라크르가 실재나 은유, 내포적 의미와는 대립되는 텅 빈 기호라는 주장과 뒤섞여 버린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기호와 실재의 구분을 와해시키고 실재의 소멸이 당도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논리의 기저를 이루는 기호와 실재간의 이분법 자체를 무효화하지는 않는다.『트루먼 쇼』를 이미지 프로세스(image process)와 관객의 지각이라는 범위로 이행시켜 독해할 경우, 이미지의 실재, 그리고 미디어의 존재는 그 기능이 변환되었을 뿐, 실재성과 물질성이 소멸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드리야르가 역사성과 실재성 함몰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으로 내세우는 내파의 함의를 새롭게 파악해 볼 수 있다. 내파는 시뮬라크르에 의한 실재의 함몰이 아니라, 가상과 실재의 구분을 존속시켰던 시간과 공간, 지각 영역의 좌표가 변동되었음을 의미한다. 텔레비전 이후의 영화 이미지는 영화의 연속적 실재감이 지녔던 헤게모니를 의심하고 불연속의 장을 내면화한다. 그 결과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흔적은 눈속임과 투명성의 논리 속에서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자체의 구체성과 물질성을 첨예화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시뮬라크르를 발생시키는 미디어의 영향력은 관객(혹은 시청자)의 지각적 층위, 사회적 경험의 여타 영역과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의미의 효과를 생성하는 것이다. 텔레비전 이미지의 극사실성을 이루는 뼈대인 "눈속임"또한 이전의 재현적 공간과 장면을 소멸시키지 않으며, 기존의 사실주의적 시각 이미지가 작도(作圖)했던 시공간적 도해와 이접(disjunct)함으로써 긴장의 지대를 생산한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은 지각 영역에서 팽팽하게 전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텔레비전이 창출한 후기 자본주의 미디어 제국에 어떤 역사적 가능성, 전복적 조짐도 없다고 말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그는 예전에는 자아의 생활 경험과 노동 생산력, 정치적 의사 결정과 역사적 기억을 가능케 하는 실재의 불변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대체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어떤 우화도, 이야기도 . . . 플롯도 성격도 없다"라는 논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실재의 언저리에서 실재를 거부하지만, 실재에 대한 향수 어린 욕망이 고착되어 있는 이러한 물신주의적 논리는, 텔레비전 이미지와 영화 이미지의 교호 작용을 실재/가상(假像)이라는 내러티브를 이데올로기적인 공간으로 구축하는 것에 복속시킨다.¹⁹⁾ 그 결과 『트루먼 쇼』를 비롯하여 텔레비전의 주사선과 핸드 헬드 카메라, 줌 인(zoom-in) 등의 이미지 제작술은 음모 영화(conspiracy film)라는 하위 장르, 혹은 음모 내러티브(conspiratial narrative)와 결탁한다. "진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저 너머에 있다"는 신념에 입각한 음모 영화의 실체는 정보 유통량과 비선형적 시공간 벡터(vector) 이외에는 그 전체적 윤곽을 포착할 수 없는 비가시적 테크놀로지 속에서는 인간의 경험이 총체성의 원리로 복원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²⁰⁾ 이를 토대로 음모 내러티브는 테크놀로지를 보이지 않는 손으로 범주화하고, 이에 따른 표상 체계를 이중적으로 조립한다. 보드리야르의 관점으로 음모 이론을 개작할 경우, 음모 내러티브는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일으키는 지각적 경험의 불안정성을 해소하고, 실재하는 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존속시키는 유토피아적 세계관을 실재/시뮬라크르의 이원적 논리로 지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테크놀로지의 편재성과 파편화된 경험 사이의 불안에 빠져 자기 파괴로 치닫기 이전에 주체는 양자 택일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만약 경험의 실체를 파악하고 싶다면 그는 테크놀로지의 표피를 벗겨내고 인공성과 임의성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의 음모(All the President's Men)』 등 알란 파큘라(Alan Pakula)의 편집증 영화(paranoid film)). 만약 테크놀로지로부터 도망치고자 한다면 그는 테크놀로지 제국을 둘러싼 이미지의 장벽에 흠집을 내고 그 틈새 사이로 빠져나가야 한다.(『다크 시티(Dark City)』) 이러한 이중화를 경유하는 공통분모는 흥미롭게도 탈외디푸스 현상, 그리고 이를 대체하는 또 다른 외디푸스 내러티브와 연결된다. 이 두 계열의 음모론적 내러티브 모두는 가부장적 입법이 통치하는 외디푸스 영토의 상실, 혹은 일종의 외상(trauma)을 극화하고 있다. 음모 이론에는 가부장제의 파괴를 대체하는 초월적 기표로서의 이미지가 주체의 형성을 자극한다. 텔레비전 이후의 미디어 시뮬라크르, 그리고 텔레비전 화면은 세계를 둘러싼 기호의 의미를 보증하던 아버지의 시선을 대신하여 스스로 시선의 주체임을 자부한다. 아버지의 교체, 즉 실재의 아버지에서 기호의 아버지로의 교체는 주체 형성의 과정으로 도약하는 첫 단계부터 그의 기억을 봉합한다. 그렇지만 이미지 자체의 흐름은 불안정하고 임의적이기 때문에 주체는 자신을 형성한 근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시선(look) 과 응시(gaze) 사이의 분열에 빠져든다.

『트루먼 쇼』에서 버벅은 자신의 출생과 성장 과정에 개입된 조작과 개입의 손길을 뚜렷한 실재로 기억할 수 없다. 버벅이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 요트 사고로 실종된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리는 플래시백(flashback) 장면은 프레임 주변이 마스킹(masking) 형식으로 조작된 엿보기 식의 광각 렌즈로 촬영되었다. 이 카메라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악조건에도 어김없이 부감 쇼트로 비상하고, 휘몰아치는 파도와 물보라에도 견디는 렌즈의 내구성을 자랑하듯 앙각 쇼트로 버벅의 회상적 시공간 주변에서 부유(浮游)하고 있다. 실제 아버지를 잃는 외상이 각인되는 자리(이는 트루먼의 응시의 영역이다)에 시뮬라크르의 상징적 편재성을 자임하는 시선의 전지적 권능(이는 시선이 침투하여 기억의 전개를 흠집 내는 과정이다)이 내면화되는 이 장면은 트루먼이 홀로 아버지와 진실의 세계를 찾는 항해에도 반복되어, 내러티브의 중심적 전개로 확장된다.

이러한 내러티브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트루먼이 체험하는 지각 영역의 긴장은 총체성을 복원하려는 근원으로의 여정으로 수렴된다. 트루먼의 몽타쥬 행위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론에 내재한 논리적 긴장(실재/허구의 대립, 그리고 이미지의 지각에서 발생하는 경험의 다층성 사이에 내포된 긴장)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그는 회사에서 잡지에 나오는 인물들의 특징을 오려서 실비아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는 몽타쥬를 만든다. 모델 개인의 사진들을 연쇄시키는 행위는 미디어가 나타내는 시뮬라크르의 연속, 말하자면 시뮬라크르의 "눈속임"일 뿐, 실비아의 상 자체는 아니다. 트루먼이 찾고자 애쓰는 실비아의 관념적 상에 부합하는 인물은 시헤븐의 시뮬라크르가 증여하는 이미지 자체를 파열시키지 않고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몽타쥬 사진에는 시공간적 위치가 서로 다른 이미지들의 다층성과 이질성이 찢어진 자국의 형태로 뚜렷이 드러난다. 기억의 자취들을 간신히 더듬어 자신의 상을 짜 맞추는 행위를 우리는 "기억의 창조적 지도그리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지도를 통해 트루먼이 찾고자 하는 지점은 시헤븐 '바깥'에 존재한다고 믿는 피지 섬, 즉 실비아가 존재하는 풍요와 근원의 땅, 어머니의 땅이다. 그는 시헤븐의 미디어 시뮬라크르가 제공하는 불임(그는 자신의 부인과는 어떤 성 접촉도 행하지 않는다)과 차가움, 무미건조한 반복의 상태를 넘어 첫 키스의 상대자를 이상적 세계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불완전한 남성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여행을 선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