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세 번째 시즌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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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세 번째 시즌 '희망' :::

김관식 | 2000년 03월 02일
조회 5839

우리에게 있어서 광주가 그랬던 것처럼, 세계 현대 역사에 있어서 베트남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원했건 그렇지 않건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베트남 전쟁을 함께 겪었고 지금까지도 그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또한 분명히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많은 베트남 전쟁에 관한 영화들이 있었다. 특히 많은 영화들이 미국에서 만들어진 베트남전 소재의 영화들이었다.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 풀 메탈 자켓에서 우리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베트남전을 돌이켜 생각하고 후회했었다. 어째서 베트남에 갔어야 하는지, 그곳에서 그들이 벌였던 싸움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국내에서도 베트남에 관한 영화가 몇 개 있었긴 했다. 영화, 하얀 전쟁을 위시한 몇몇 영화들은 전에 나열한 미국의 베트남전 영화들에서 조금 더 나아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과거의 베트남전이 안겨주는 아픔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었다. 이제, 과거와 현재를 잇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베트남 출신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은 보다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앞에서 말했던 다른 나라(특히 미국이나 국내의..) 감독들과는 분명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비단 자아와 타자의 개념은 아니다. 물론 베트남이 자신의 나라인가 아닌가도 분명, 바라보는 시각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시각적인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현재'라는 시간적 개념이다. 다른 베트남전 영화들이(그것들이 전쟁영화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사건이 일어났던 과거에만 치우쳐서 사고하고 있는데 반하여, '씨클로'같은 영화들은 지나간 과거보다는 현재에 더욱 더 가까이 있으며 집착하고 있기도 하다. 역시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베트남'은 그저 지나간 과거일 뿐이지만 그곳에서 살고 있는, 혹은 그곳과 연결되는 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베트남은 살아 나가야 할 현재인 것이다.

또 다른 베트남 영화가 있다. 아, 아니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미국 영화이다. 하지만 감독은 토니 뷔라고 하는 베트남 사람이며 대부분의 배우도 베트남인이였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지금까지의 베트남 영화들 중에 가장 색다른 희망을 가지고 있는 영화임에 틀림 없다.

"THREE SEASONS"는 다시 말하지만 희망의 영화이다. 이전까지 베트남을 다루었던 영화들에서 한번도 보여지지 않았던 '희망'을 가지고 있는 영화인 것이다. 그렇게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여겨지던 '씨클로'에서조차 '현재'의 베트남은 '과거'의 베트남이 안겨준 어두운 그림자를 벗어던지지 못했었다. 전쟁을 겪은 베트남은 영화에서조차 항상 전쟁이라는 어두운 절망 속에서 헤매이고 있어야만 했으며, 간혹 전쟁을 모른 척하고 현재에 다다른 척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현재조차 과거에 붙잡혀 또 다시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은 언제나 'Two Seasons'였던 것이다. 과거와 현재만 있는 것. 미래는 없는 암울한 곳이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토니 뷔는 달랐다. 베트남은 다시 일어서야 했던 것이다. 세 번째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것, 그래서 희망을 얻는 것, 그리고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이제 베트남 영화가 가져야 하는, 아니, 베트남이 가져야 하는 새로운 자세였던 것이다.

영화 "THREE SEASONS"는 아주 세련된 형식으로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영화는 현재의 베트남 안에서 일어나는 네 가지 희망적인 만남을 그리고 있다. 하나는 나병으로 죽어가는 시인과 시인의 꽃농장에 고용되어 시인 대신 글씨를 써줌으로써 희망을 만들어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 씨클로 청년과 창녀의 사랑, 그리고 그 창녀와 미국인 아버지의 만남과 용서, 또 하나는 잡다한 물건을 파는 어린 소년과 소녀의 만남이 그것이다. 감독인 토니 뷔는 첫 작품답지 않게 이 많은 이야기들을 때로는 왕가위처럼, 또 때로는 타란티노처럼 투박하지 않게 잘 섞어 연결하고 있다. 모든 인물들과 그들의 만남이 각기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 공존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가 왕가위나 타란티노의 영화처럼 호흡이 가쁜 영화는 절대 아니다. 이 영화는 정 반대로 최대한 잔잔하며 절제된 영화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이 영화가 제시하고 있는 희망의 진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차분함에서 우리는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갖게 되는 아주 작은 희망을 쉽게 지나칠 수 없게 되는 것이며, 또한 감독이 그려내는 어쩌면 어둡고 칙칙하게 느껴질 지 모르는 베트남의 현실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일 것이다.

이 영화가 베트남이 가지고 있(다)는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혹은 과장되고 부각시켰다는 쓸데없는 비평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아름다움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런 모든 것들은 상대적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베트남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가장 서민적인 것, 화려하게 치장된 도시 뒤에 숨겨져 있을 법한 낡고 허름한 골목길이 어쩌면 좀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제 베트남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그 자신조차도 전쟁으로 얼룩진 어두운 과거를 벗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희망찬 새로운 시즌을 그려 나가야 하는 것이다.

베트남의 세 번째 시즌.

그것은 바로 병든 시인에게 소녀가 일깨워주는 '시적인 꿈'이며 평범한 사람들끼리 만들어가는 사랑이고, 전쟁이 만들어낸 어색한 부녀관계 사이의 용서인 것이다. 그리고 비오는 밤마다 만물 상자를 목에 걸고 거리를 헤매이던 어린 소년과 그가 만난 작은 소녀가 함께 걸어 나가는 '희망찬' 미래인 것이다...

2000.03.02, lilact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