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 시선

<살인의 추억> 술취한 아버지의 기억


글: 홍창욱
2003년 05월 04일

술취한 아버지는 힘이 있을까? 뜬금없는 질문이다.영화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이를 생각해본다.가정의 중심이며 힘의 상징인 아버지가 술에 취했다는 것은 아버지를 하나의 나약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정녕 술에 취해 벌이는 힘의 과시는 진정한 힘의 형태라 할수 없다. 아니 힘의 상실을 초래한다. 힘은 행사자나 피행사자에게나 힘의 행사가 정당할때에만 효력을 나타내며 반대일경우 그가 가진 힘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아렌트가 말했듯 진정한 힘은 결코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상호적 지지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점에서 힘과 총은 결코 이어질수 없는 대립항이다.

<살인의 추억>을 보며 씁쓸하지 않을수 없었다. 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그 시간을 살아온 인간의 이야기가 가감없이 잘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80년대에 그곳에 없었지만 살인의 추억은 80년대를 불러냈다. 21세기의 일상속에 혼재되어있는 흔적들속에서 짜맞춰진 과거의 집단적 기억. 이제 술취한 아버지를 이야기해볼까. 술취한 아버지에게 무엇을 느꼈나. 공포와 연민이라는 표현은 그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할수 없다. 가정이라는 소속감속에 존재하는 이질감과 거부감, 이 공동체속의 광인과 나의 존재가 분리될수 없는것에 대한 허무함과 언제 이것이 종결될것인가에 대한 지긋지긋함. 그러함에도 다시 날이 밝으면 그와 같이 밥을 먹어야 하는 순환.

살인의 추억이 씁쓸한 것은, 아니 그 속의 80년대가 씁쓸한 것은 술취한 아버지를 떠올리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가정의 힘을 가진 아버지는 그가 주먹을 가졌기 때문이아니라 그가 바로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그자리 말이다. 밥상의 큰밥과 고기가 놓여진 자리, 방안의 가장 따뜻한 자리, 제삿상의 오른쪽 자리 말이다. 이는 그가 요구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힘의 본질을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만만약 그 아버지가 힘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며 힘의 본질과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행동과 폭력을 행사한다면?

80년대는 잘 알다시피 군부독재의 시대이다. 군인의 총에 의해 즉 인정받지 못한 힘의 사용에 의해 장악된 정부. 그 정부에 의해 휘둘러지는 국가와 국가의 힘은 애초에 그 자리를 찾기가 힘들다. 힘의 기원이 아니기 때문일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80년대 힘을 잃은 공권력과 그것의 무능함을 통해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재조명하고 있다. 살인사건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극악한 범죄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극악한 범죄가 살벌한 군사정권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니 이 범죄가 계속 일어나면서 여론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했고,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투여했음에도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인간적으로 참을수 없는 모욕감과 분노를 자아내게 만드는 범인의 행각은 이 영화에서 모종의 깔때기역할을 한다. 모욕감과 분노, 좌절에 대한 정신적 히스테리는 이 깔때기를 통해 범인하나 검거하지 못하는 무능한 국가권력에게 쏠리게 된다. 뻔하디 뻔한 전근대적 수사관행-고문과 자백중심의 수사-은 관료적 시스템이 보여주는 무능함의 극치이며 그나마 합리적인 수사또한 과학적 수사기술의 부족으로 좌초되고 만다. 당시 국민은 범인하나 잡지못하며 무고한 범인을 만들어내는 공권력에 대해, 허무한 공중 헛발질을 해대는 태권도 국가대표선수에게 정신적 공황을 느꼈을 것이다. 연쇄살인의 공적에게 느끼는 분노가 커질수록 이 공황은 깊어만 가지만 살인의 추억은 이 내상을 도려내기보다는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살인의 추억>이 들춰낸 국가의 무능과 힘의 공백에 대한 자조는 술취한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분노와 연민의 감정이 뒤섞여있다. 힘은 없으며 총만이 있는 허위 권력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이것이 연민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그 시대를 살아온 인간들의 삶에서 일것이다. 봉감독은 공적의 대립각으로 형사들의 인간적 고뇌와 좌절을 적절히 표현해냄으로써 그들에 대한 관객의 동일시를 시도한다. 공적과 그에 대한 분노의 깔때기인 국가, 그곳에서 멀리떨어져 존재하는 공권력의 집행자. 형사들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킴으로써 80년대, 그 시대의 무능한 힘에 대한 분노는 이들에게서 멀찌감치 비켜나있다. 물론, 구조와 인간에서 구조를 선택한 봉감독은 나름의 최소한의 조치(?)를 취하며 국가폭력을 행사한 인간을 응징하고 있기도 하다. 국가권력이 아닌 국가폭력의 집행자인 한 형사는 그의 다리를 거세당함으로써 폭력의 댓가를 받게 된다.

이 영화가 씁쓸한 이유는 80년대가 우울해서가 절대 아니다. 거짓 아버지를 끌어내리거나 거세하기 보다는 그 거짓을 어찌해서건 아버지로 만들어보려는, 그럼으로써 어떻게 해서든 그가 술에 취했을지라도 아버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메시지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지났다. 그래서 그는 술취한 아버지로 다시 돌아온지 모른다. 일상속에서 인간의 얼굴을 하며 드러나는 이 거짓권력이 우리주위에 아직도 살아있으며 언제든 그 조각들을 다시 이어 자신을 드러낼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기에 씁쓸하다.



This article is from http://www.cinel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