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뤽 고다르 - 장-뤽과 고다르의 간극 :::

라인지기 | 2000년 09월 01일 조회 1753
누벨바그: 세상에서의 성공
<네 멋대로 해라>의 비평적, 상업적 성공은 고다르의 삶의 조건을 변화시켰다. 그는 더 이상 궁핍한 평론가가 아니라 유명한 영화감독이 된 것이다. {까이에} 그룹의 느긋한 사적인 세계가 마치 폭발하듯 영화산업으로 맹렬히 돌진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누벨 바그라는 새로운 영화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장-뤽 고다르는 자신의 영화 작업에 몰두했지만, 그의 인격의 한 부분은 분명 {까이에} 그룹이 그토록 오랫동안 동경해왔던 영화산업의 화려함에 반응했을 것이다.
고다르의 영화감독으로서의 경력은 <네 멋대로 해라>의 상업적 성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다르 자신도 말하듯이 그 첫 번째의 대단한 성공은 "일련의 오해"에 기초하고 있었고, 또 <네 멋대로 해라>는 지나치게 성공적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 영화는 고다르의 몇가지 반복되는 모티프를 담고 있기는 하다. 그 영화는 자신들의 삶의 현실을 생산하는 재현체계에(재현과 현실의 역전) 갇힌 인물들을 보여준다. 보가트를 흉내내는 벨몽도는 두드러지는 하나의 예이다. 물론 그 영화의 상업적인 성공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포장한 고전적인 형태의 러브스토리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네 멋대로 해라>의 진정 혁신적인 면은 거의 다큐멘타리적이라고 할 정도로 젊은이들의 파리를 사실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사실 60대 고다르의 놀라운 다산성多産性(단지 연출 작품의 수뿐만 아니라 그가 경유해간 다양한 스타일과 주제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프랑스의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예민한 반응과 성실한 기록이다. 그런 점에서 고다르의 영화는 인류학적 보고서라 할 만하다. (고다르의 학부 전공이 인류학이었다.) 물론 고다르는 영화작가로서의 자신의 활동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보통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을 선택하는 보통의 영상 인류학자와는 거리가 있다.
고다르와 다산의 60년대를 함께 했던, 가장 중요한 두 명의 동료는 촬영감독인 라울 꾸다르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이면서 숱한 고다르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안나 까리나였다. 안나 까리나는 <네 멋대로 해라> 직후에 촬영을 시작했던 <작은 병정>의 여주인공이었다. 촬영이 진행되는 중에 그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고, 곧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를 오랫동안 괴롭힐 여성과의 불안정한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여성에 대한 불신과 숭배 사이에서 결정하지 못하고 주춤하는 고다르 영화의 남성 주인공들은 고다르 자신의 여성에 대한 태도를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고다르의 여성과의 관계는 언제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고다르는 잡지에서 안나 까리나를 발견했다. 그 점은 까리나와 결별한 후에 만난 비아젬스키에도 해당된다. 고다르는 로베르 브레송 영화에 출연한 비아젬스키를 발견했던 것이다.
고다르의 초기 영화경력(고다르에게 영화경력은 그의 개인사와 구분이 안 될 것이다. 고다르는 "영화는 삶이다."라는 말을 거듭 했다.)에서 여성과의 관계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고전 영화에 대한 변화하는 태도이다. 여성에 대한 태도가 양가적이였던 만큼 고다르는 미국 고전영화에 대해서도 아주 복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미치광이 삐에로>까지 미국 고전영화는 고다르에게 하나의 예술적 전범이었다. 미국영화의 재평가를 적극적으로 행했던 비평가-영화작가 고다르에게 미국 고전영화의 존재는 모든 영화적 성취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좌절감도 주었지만, 일단은 그가 실험해 볼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의 목록들이었으며 동시에 그가 도달해야 할 예술적 목표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영화와의 관계는 60년대 후반이 되면서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한다. 더 이상 미국영화는 낭만적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베트남 전이 한창이었을 때였다. 점차 정치적 의식이 성숙해가던 고다르에게 미국영화의 침투는 베트남의 공습과 평행하는 어떤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 고전영화와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새로이 정립되어야만 했다. 미국 고전영화는 모방하고, 추억하고, 재생해야 할 어떤 것에서 싸우고,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 어떤 것으로 바뀌었다. 또 이 시기에 고다르는 까리나와 헤어지면서, 영화와 공적으로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사적으로 맺는 관계에서도 위기를 맞게 된다. <미치광이 삐에로>에는 이 시기에 고다르가 느꼈을 절박함이 강하게 배어 나온다. <미치광이 삐에로> 이후에 나온 <중국여인>과 <주말>에서 고다르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정치로의 선회를 도모하려 하지만, 여전히 그 영화들의 주된 정조는 허무와 혼란감이다.
지가 베르토프 집단: 혁명적 영화작가로의 변신
고다르는 '68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다르는 <그녀에 대해 알고싶은 두세가지 것들>에서 자본주의 하에서의 소비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해 신랄하면서도 정치한 분석을 행한 바 있다. <중국 여인>은 곧 전개될 학생운동을 섬뜩할 정도로 정확하게 예언한다. <주말>에서는 혼란스럽기는 해도, 대안적 삶의 가능성에 대해 절실하게 묻고 있다. 고다르 최초의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이자 결정적으로 정치에 투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은 68년 칸느 영화제를 폐쇄하는 것을 주도한 것이었다. 68년 초에 누벨바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앙리 랑글로와가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에 의하여 시네마테크 원장직에서 퇴임당하였다. 이에 항의하여 고다르는 프랑소아 트뤼포와 함께 직접행동을 통하여 칸느 영화제를 폐쇄시켰다. 이 사건 자체가 68의 전조이자, 68년을 촉발시킨 중요한 계기였다. 문화정치 혹은 라이프 스타일-정치 life-style politics라는, 이전의 혁명들과 차별되는 68 혁명의 고유성이 그 사건을 통해 이미 예고되었던 것이다.
68을 계기로 그의 영화작업은 이전의 영화 작업과 완전히 결별한다. 그의 혁명적 '영화일꾼'으로의 변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고다르라는 작가적 서명을 포기하고, 지가 베르토프라는 영화집단을 결성한 것이었다. 그루페 지가 베르토프는 소비에트의 영화작가가 새로운 혁명 사회의 건설을 기록했던 것처럼, 고다르는 새로운 이미지의 '건설 build'을 새로운 정치적(동시에 미학적)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새로운 이미지의 건설은 새로운 것을 건설하고자 하는 혁명적 열정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는 목표이다. 혁명이 기존 사회의 파괴를 요구하는 것처럼, 새로운 이미지의 '건설'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이미지의 파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이 정치적(곧 미학적) 목표에 도달하는 고다르의 무기는 분석이다. 68을 통과하면서 만들어진 <즐거운 지식>에서 내러티브는 최소한도로 줄고, 이미지의 내용은 스튜디오 내의 두 캐릭터(그나마도 거의 움직이지 않는)로 축소된다. 대신 사운드와 시각적 기호가 전면에 부각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미지의 기능을 분석한다. 고다르와 고랭으로 구성된 지가 베르토프 집단은 <즐거운 지식>에서 출발된 이미지 분석을 계속 수행한다. 이미지를 혁명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이미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이미지가 전체 사회 구성체를 어떤 식으로 '분절화 articulate'하는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었다. 고다르가 이미지 분석을 위하여 채택한 방법론은 알튀세르적 마오주의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나온 일련의 작품들인 <영국 소리> <프라브다> <동풍>은 다 건조하고, 교훈적이다. 이미지의 작동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 영화였기에 처음부터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다르의 상업영화에 대한 환멸이 일차적으로 영화와 관객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면, 68혁명으로 고조된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는 영화와 관객간의 새로운 관계-생산자와 소비자간의 철저한 분리가 아닌-의 배태를, 즉 새로운 영화적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을 가능성을 키웠지만, 안타깝게도 혁명적 열기는 금새 사그라들었다. 게다가 까리나의 관계가 그랬던 것처럼 안느 비아젬스키의 관계도 고다르에게 엄청난 환멸만을 남긴 채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고다르는 상업영화로 복귀한다. 그러나 상업영화로의 복귀가 상업영화의 논리에 투항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다르에게 중요한 것은 영화제작의 생산/분배/유통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유토피아적 목표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우선 혁명적인 내용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돈의 출처가 문제가 아니었다. 왜 자본가의 돈으로 혁명적인 영화를 만들 수 없단 말인가. <만사형통>을 만들 때의 고다르의 전략은 그런 것이었다. 그런 노력은 고다르의 가장 뛰어난 영화 중의 한 편으로 결실맺었다. <만사형통>은 고다르가 60년대 후반부터 추구해왔던 혁명적 이미지의 건조가 내러티브를 포기하지 않고도 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고다르에서 쟝-뤽으로
<만사형통>을 만들기 육개월 전에 고다르는 치명적인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그가 위태롭던 시기를 포함하여 그후 이년 반 동안 그를 간호해 주었던 이가 안느-마리 미에빌이다. 고다르는 처음으로 고다르 자신처럼 카메라의 뒷편에 있으며(그녀는 사진작가였다), 고다르의 결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여자와 함께 하게 되었다. 카리나, 비아젬스키, 심지어 장-삐에르 고랭에게도 고다르는 현대 영화의 가장 위대한 창조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에빌에게 고다르는 그저 쟝-뤽일 뿐이었다. 그녀는 가차없이 마오이즘 정치 담론의 전제들을 비판했다. 그녀의 주장은 그 정치 담론이 프랑스에서의 일상의 삶을 도외시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상업영화의 한계는 이미지가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것을 분석함으로써 밝여야한다고 주장했고, 교의적인 혁명영화의 제작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다르는 그녀와 함께 파리에 비디오 장치들을 갖춰놓은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매일의 삶에서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이 교차하는 방식들과 그 교차점에서의 이미지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 탐구하기 시작했다. 고랭은 고다르의 이 새로운 시도에 실망해서 미국으로 떠났고, 고다르와 미에빌도 곧 파리라는 대도시에서의 고독을 피하기 위해서 그레노블로 아틀리에를 옮겼다.
고다르와 미에빌이 착수한 최초의 작품은 지가 베르토프 시절에 완성시키지 못한, 팔레스타인에 관한 다큐멘타리였다. 69년 말에 고다르와 고랭은 레바논과 요르단 지역에 가서 당시 한창이었던 팔레스타인 해방전쟁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그들은 <승리할 때까지>라는 제목까지 달고 그 다큐멘타리를 완성할 계획이었지만, 그 영화는 팔레스타인 해방군이 요르단 내전중에 집단 학살당함으로써 중도에 포기되고 만다. 이 필름 조각을 기초로 고다르와 미에빌은 <여기와 다른곳>에 나오는 한 토론 장면을 구성한다. 또 그 토론은 고다르의 페미니스트 포르노그라피라 할 <넘버 2>로 이어진다. <넘버 2>는 필름과 비디오를 함께 사용하여 가정에서의 정치와 성의 교차를 탐구한다. 둘의 공동창작은 TV에서 위탁받아 제작한 다양한 영화로 결실맺는다. 그 영화들에서 고다르와 미에빌은 소통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 그리고 어린이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 TV 프로그램은 그들로서도 힘든 작업이었고, TV 시청자들에게도 전혀 다른 태도를 요구했다. 그 둘의 공동작업은 TV의 전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들은 고다르의 가장 성공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에세이들로 인정받는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포스토모던 생존 전략
76년에 고다르는 또 한 번 삶의 위기를 맞게 된다. 미에빌과의 성적 관계는 파경을 맞았고, 그레로블에서의 실험은 점차 실패로 끝날 것임이 명백해졌다. 그 둘이 생각했던 소형 스튜디오는 대형 미디어 기업이 장악한 현대 사회에서 그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자본도 끌어들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에빌은 스위스로 돌아가기로 결심했고, 고다르도 그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고다르의 이전 삶과 비교할 때 비교적 긴 시간의 안정기가 시작되었다. 제네바 호수의 강둑에 둘러싸인 고향집에 자리를 잡은 고다르는 청년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파리와 제네바를 왕복했다. TV에서의 두 번째 위탁 프로그램을 끝내고 나서 미에빌은 고다르에게 이전까지 그들의 실험에서 축적한 것을 활용해서 영화를 만들 것을 종용했다. 이 시도의 첫 번째 결실이 바로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혹은 <삶>이다. 그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훨씬 솔직하게 자전적이고 소규모의 스탭과 함께 찍은 영화이긴 하지만, 이 영화는 여전히 고다르가 20년 동안이나 천착한 예술, 섹슈얼리티, 정치에 관한 문제를 들려준다. 그러나 <삶>은 훨씬 부드러워졌고 당대의 현안에 대해 좀 초월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점차 영화를 다시 만들어가면서 이전 주제에 보태 새로운 주제군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삶>에서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열정>과 <프레농 카르멘>에 이르면 전통문화와 종교에 관한 고다르의 깊은 사유가 영화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미학적으로도 변화가 일어났다. 정서적 톤이 부드러워졌다면 미학적으로는 더욱 엄격해졌다. 그리고 고다르의 새로운 창작원칙, 즉 분업 대신 전 스탭이 창조적 경험을 공유해야만 한다는 고다르의 신념은 영화작업을 더디고 힘들게 만들었다. 고다르의 해결책은 스탭을 가능한한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촬영 일정을 더욱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고, 영화 작업을 롤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촬영된 영화가 <마리아께 경배>과 <리어 왕>이었다. 이 시기의 초반부에 고다르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조에트로프 스튜디오와 관계를 맺었지만, 그 스튜디오가 망하면서 코폴라와 함께 구상한 기획은 다 무산되었다.
고독
<리어 왕> 이후의 고다르의 삶을 새로운 국면이 시작한 것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79년 이래로 고다르가 채택한 삶의 방식을 더욱 강화한 것인지 딱 잘라 말하기는 쉽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가 여전히 다양한 영역에서, 예컨대 장편 상업극영화, TV 프로그램, 실험적인 비디오 작품 등의 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장편 영화만 놓고 보면 그의 이미지는 더욱 단순해졌지만, 편집은 더욱 정교하고 복잡해졌으며, 특히 다층의 사운드트랙은 극히 복잡해졌다. 이 시기의 장편 영화로는 <우측을 경계하라>와 <누벨 바그>가 있다. 이 영화들에서 내러티브는 점차 빈곤해진 반면 사운드와 이미지의 관계는 더욱 더 풍요로와지고 있다. 이 시기 고다르의 가장 중요한 성취라면 <영화의 역사> 연작일 것이다. 89년부터 시작된 기획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이 영화사 연작은 픽션과 다큐멘타리에 관한, 더 나아가 역사와 재현에 관한 통념적인 구분을 무화시킨다. 고다르가 만들고 있는 것은 20세기의 역사이자 영화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다큐멘타리와 픽션을 아우르는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 연작 작업은 <신독일 0년>에서 보다 간결한 형식으로 제시된다. 고다르의 말년의 작업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육중한 고독의 느낌을 전해준다면, 그것은 더욱 의미있는 소통을 위한 준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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