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영화이야기

질투는 나의 힘 : 싸구려 양주, 캡틴 큐


글: 정영선
2003년 04월 10일

영화는 한 클래식 라디오 방송의 소리로 시작합니다. 주인공이 한 초등학교에 방과 후 수업 교사로 면접을 보러간 순간, 영화는 느리게 느리게 그리고 권태롭게 초등학교 교장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순간, 느닷없이 국기 파는 아저씨가 들어오죠. 아저씨는 사람들이 국기 게양법을 모른다며 도덕 교과서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 시간, 운동장에선 아이들이 마카레나 춤을 추며 체육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아, 이건 또 한편의 홍상수 영화가 아닌가. 순간 불안해집니다.

영화는 두 남자의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능력이 되는 놈과 안 되는 놈의 이야기. 이들의 연애담을 축으로 연애담과는 상관없는 담론들을 이끌어 내는 게 이 영화의 포인트죠. 으음. 어떤 남자들 얘기냐구요? 한 남자는 다른 남자한테 두 번이나 좋아하는 여자를 빼앗길만큼 지지리도 못난 남자고, 다른 남자는 한 남자에게서 두 명의 여자를 빼앗을만큼 능력있는 남자입니다. 우선 능력있는 남자부터 살펴볼까요?

한 잡지사의 편집장으로 어느 정도의 명예직에 종사하면서 아내와 딸과 행복하게 살아가며 애인들을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로 갈아치우는 한윤식(문성근). 장인에게 바람 피운 현장을 잡혀도 당당한 이 남자는 이태원과 박태준을 가늠할만큼의 문학적 소양도 지녔고, 전자키보드로 음악도 작곡할만큼 로맨틱한 면도 지녔고, 아랫사람 부리는 재주도 지녔습니다. ‘아내에게도 잘하고 애인한테도 잘하는 놈이 아내한테 못하고 애인없는 놈보다 낫다’는 명쾌하고 현실적인 연애관도 가졌죠. '문학'과 '여자'라는 화두를 지닌 채 살아온 이 남자가 불혹의 나이에 인정하는 사실은 '문학'은 이제 물 건너갔고 남은 건 '여자'뿐이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로맨스의 힘으로 살아가는 남자죠.

그에 반해 주인공 이원상(박해일)은 보다 이상적입니다. 하지만 이상적이라고 해서 순수하고 지고지순하냐,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좀 소심하고 말 못하고 내면이 복잡할 뿐입니다. 무슨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여자친구가 바람난 남자가 근무하는 잡지사에 대책없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혼자보기는 아까울만큼 처량한 젊은 날의 기록들을 채워갑니다. 부당한 처사 하나에도 찍소리 못하고 말이죠. 그리고 시간은 흘러 두 남자는 묘하게 가까워집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이들이 사도-마조히즘 성향을 지닌 인물들이 아닐까 심히 의심했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던 어느 날, 한윤식은 캡틴큐를 좋아한다는 이원상의 말을 기억하고 그 양주를 권합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하죠. ‘이 싸구려 양주, 자꾸 마시게 된단 말야’. 바로 그 순간, 영화는 내재하고 있는 비극적 요소를 보다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속내를 털어놓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이 동등한 지위를 획득했다고 여겨지는 순간에 그 한 마디로 인해 주인공이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을 재확인 시키는 것이죠. 한윤식에게 그는 자꾸 마시게 되는 싸구려 양주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아시다시피, 캡틴큐는 이제 정말 추억의 싸구려 양주일 뿐입니다.) 주인공이 ‘질투’의 힘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에겐 노력해서 될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들이 있는 것이죠. 그 태생적인 한계란 단순히 지식과 사회적 배경 같은 외적인 요인만이 아니라 인생을 해석하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의 틀 자체가 다른 것이죠. 어떤 것이 더 좋다라고 딱히 말할 수는 없으니 영화에서 좀 더 많은 지위를 문성근에게 준 것으로 보아 감독이 전자의 손을 들어준 듯 보입니다. 영약한 놈이 세상 살기도 편한 법이니까요.

그래서 결핍된 것이 너무나 많은 주인공은 그것을 채워가는 용기보다는 보다 편하고 쉬운 질투를 택합니다. 그리고 그 질투의 대상이 차츰 선망의 대상으로 전이되어 가면서 슬슬 노예근성을 드러냅니다. 아마도 그는 그렇게 자라왔을 겁니다. 사람들은 보다 큰 사회적 구조에 굴복해 권력이 길들여지면 자신이 지녔던 분노의 원인조차 잊으니까요.

그러나 어찌보면 주인공은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는 상처가 만성화된 사람이니까요. 사람들의 습성은 대개가 학습됩니다. 특히 폭력의 경우가 그렇죠. 맞아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잘 때릴 줄도 모릅니다. 어떻게 때려야 하는지 그 방법조차 모르니까요. 하지만 맞아본 사람은 압니다. 어떻게 때려야 하는지 어딜 때려야 아픈지 말이죠. 상처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상처를 받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도 끊임없이 상처를 받습니다.

영화는 일단 고르게 반죽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완성도도 배우들의 연기도 신인감독의 연출력도, 뭐 하나 크게 흠잡을 게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상도 많이 탔겠죠. 하지만 이젠 그런 영화들은 적어도 제 취향은 아닙니다. 한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고 홍상수 감독에 열광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젠 병든 캐릭터들과는 안녕, 하고 싶습니다. 이 대책없는 우울함이 시시해지기 시작했거든요. 영화는 <볼링 포 콜럼바인>처럼 씩씩했으면 좋겠고 <지구를 지켜라>처럼 자기의 메시지를 담았으면 좋겠고 아니면 <어바웃 어 보이>처럼 잠깐이라도 좋으니 외롭게 지내지 말고 우리 같이 살자고 손을 내밀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의 내용이 질투’뿐인 청춘은, 언어가 주는 느낌만큼 현실에서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희망은 희망이고, 질투는 질투인거죠. 질투의 힘으로 살아가는 청춘에 남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그건 자신이 비난하고 질시했던 대상을 결국 닮아가는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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