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매> 그, 혹은 그녀와 화해해야 하는 이유
글: 정영선
2003년 09월 18일
'당신은 어떤 주제의 영화를 좋아하느냐'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장르나, 감독은 있지만 좋아하는 주제라...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전 화해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꼭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주인공들이 화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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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매는 죽은 영혼과 산 자를 이어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들이 흔히 '무당' 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죠. 박기복 감독은 근대화 과정에서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는 무당들의 흔적을 끈기있는 시선으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시작합니다. 이른바 '영혼'을, '사후세계'를 믿는냐 아니냐에 대한 기준없이 모두가 믿는다는 가정하에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죠. 하지만 전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하는 유물론자입니다. 처음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혹은 객관적인 정보 전달의 수준이었죠. '아, 이런 게 세습무구나. 이런 게 강신무구나. 각 지방의 굿 풍습은 이렇게 다르구나. '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스크롤이 올라갈 무렵,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이 영화는 제가 좋아하는 '화해'에 관한 영화였거든요.
'굿' 이란 죽은 자와 산 자가 평생을 살고도 표현하지 못한 묵은 감정을 무당을 통해 풀어내는 화해의 행위입니다. 때문에 여기서 죽은 '혼'의 과학적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굿판이란 죽어서 떠난 당신에게 내가 해주지 못해 가슴 속에 응어리처럼 남아있는 한맺힌 감정들을 풀어내는 자리니까요.
하지만 죽은 자와의 화해는 후회뿐입니다. 굿판의 풍경이 언제나 스산한 통곡소리로 가득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당 박미정씨는 "살아 생전에 화해하는 것이, 죽어서 화해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립니다.
한이 많은 어머니의 몸신이 들어와 무당이 된 진도의 강신무 박영자씨. 그녀 역시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생전에 한을 풀지 못한 그녀의 어머니는 결국 그녀의 몸신이 된 거죠.
영화는 인터뷰를 한사코 거부하던 당골레(세습무) 채둔굴 할머니의 씻김굿 장면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언니를 위해 손수 굿을 준비한 최정례 할머니의 한 많은 곡조에, 평생을 남의 몸을 빌려 살아야 했던 영매들의 고단한 삶은 그대로 녹아납니다.
<영매>는 근대화 이후 보다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기록문학의 의미있는 성취인 동시에 한국형 가족상에 잘 부합되어 울림을 주는 영화입니다. 무당들의 고단한 삶 속에서, 그리고 그들에게 의지하여 조금이라도 죽은 자와 마주하고 싶은 산 자들의 몸짓에서 우리는 2003년 현재,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가치들을 조금씩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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