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완전정복> 맛있지만 영양가는 없는 밥상
글: 정영선
2003년 10월 23일
중국 갔을 때 일입니다. 야간기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뜨거운 물이 필요했습니다. (왜냐구요? 밤기차 여행을 대비해 밤참으로 컵라면을 가져갔거든요.^^V) 그런데 문제는 뜨거운 물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안내양에 다가가서 물었죠. ‘핫 워러?’ 못 알아듣더군요. 아, 내가 발음을 너무 굴렸구나. 다시 물어봤습니다. ‘핫 워터?’ 으음. 그래도 반응이 없더군요. 결국은 손짓을 동원해 물 마시는 흉내를 냈더니 알았다는 듯 웃으며 뜨거운 물이 나오는 정수기 앞으로 데려가더군요. 역시 만국의 언어는 바디랭귀지임을 다시 한 번 실감했습니다. -.-;
인간 사이의 거의 유일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언어는 확실히 재미있는 도구입니다. 그 도구의 사용에 따라 본인의 감정과 의사는 판이하게 전달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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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게 재미있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웃기고 재밌긴 하지만 그건 말썽꾸러기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장혁과 깨물어주고 싶게 귀여운 이나영 덕분이었지, 왕년에 <비트>를 찍어서 청춘물에 일가견이 있을 것만 같았던(!) 김성수 감독의 연출력 덕분은 아니었으니까요.
영화는 해프닝의 연속입니다. 이유없이 넘어지고, 웃고, 때리고, 뛰어다닙니다. 개별적인 해프닝들은 그다지 개연성이 없습니다. 자막과 애니메이션의 연출은 그저 요즘 영화들 같다는 느낌만 더해줄 뿐입니다. 미국에 입양된 딸에게 어머니가 느끼는 언어의 장벽도 살아나지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10년간 배운 영어를 1주일도 써 먹지 못할 것’ 이라는 이나영의 대사에 힘도 실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유없는 ‘잠수하기’는 도대체 왜 나오는 걸까요? -.-;
오래전, 키노에 서동진씨가 <꼬마유령 캐스퍼> 에 대해 비평을 한 글을 보고, 한참 격분했던 적이 있습니다. 난 그 영화가 그저 재미있었는데, 영화를 있는 그대로 재미있게 보면 되지, 왜 그걸 굳이 따지고 들어야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른 생각입니다. 영화는 오락일수도 있고 동시에 좋은 텍스트일수도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가치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건 어느 한 쪽으로의 편식입니다. 요즘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귀엽고 상냥한 영화들뿐입니다. 최근에 개봉한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나 <위대한 유산> 역시 코믹한 캐릭터들과 어떤 판타지적 상황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본 뼈대는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영어완전정복>은 맛있게 차려진 밥상입니다. 영양가는 좀 없지만 씹기 쉽고 소화하기 쉬운 것들만 골라 놓았습니다. 그러니 씹으려는 노력도, 소화시키려는 노력도 필요 없습니다. 맛있게 먹어 주기만 하면 되죠. 하지만 이런 영화들만 편식하다보면,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영양가 있는 영화들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간 조만간 이가 썩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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