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영화이야기

영화 속 음식과 부엌 이야기


글: 정영선
2006년 09월 22일

얼마전 예술의 전당의 <부엌 x 키친>전을 보러 갔을 때, 인상깊었던 중의 하나가 영화 속 부엌의 사진을 전시해놓은 것이었어요.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편이라, 그 스틸 사진 한 컷 한 컷을 아주 유심히 바라보았지요. 그러다 문득, 이 부엌들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들을 담아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마빈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책을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식문화라는 것 자체가 꽤 흥미진진해요. 무엇을 먹느냐 또는 어디서 어떻게 먹느냐는 그 주체들의 문화나 취향을 대변해주죠. 물론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영화 속에 쓰인 음식들과 부엌엔 더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구요.

영화 <바베트의 만찬>이나 <음식남녀>처럼 음식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영화에서 주인공이 무언가를 먹는 행위는 그들의 심리상태를 대변해주죠. 요즘 영화들은 현대인의 고독이나 소외를 많이 다루고 있으니, 그 예를 찾아보면 더 쉽겠군요. 현대인의 고독을 다룬 영화라면 빼놓을 수 없는 영화, 차이 밍량의 <애정만세>. <애정만세>의 주인공들은 모두 혼자 다니고, 혼자 밥을 먹죠. 그리고 심지어 둘이 밥을 먹을 때도 이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아요. 이 영화를 봐도 주인공들이 먹는 건 언제나 라면과 담배, 술이 전부죠. 심지어 주인공 메이는 케이크를 먹을 때조차 냉장고에서 꺼내서 그 앞에 쪼그려 앉은채 먹지요. 그들에게 음식을 먹는 행위는 어떤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닌, 그저 살아가기 위해 한 끼를 때우는 것처럼 보여요. 이런 모습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산 샌드위치와 김밥을 들고 뛰어가거나 고시원 근처 포장마차에 서서 바쁘게 아침을 해결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닮아있어요.

조금 다르지만, <봄날은 간다> 역시 마찬가지예요. 은수가 상우에게 해주는 건 언제나 라면이죠. 그녀가 상우와 가까워지기 위해 처음 건넨 말도 '라면 먹고 갈래요?' 였고, 결국 상우로부터 듣게 되는 말도 '내가 라면으로 보이니?' 라는 말이었죠. 상우는 은수로부터 따뜻한 밥상을 받길 원했겠지만, 그녀가 상우에게 줄 수 있던 건, 라면뿐이었던거죠. 그녀의 사랑은 인스턴트, 그 이상일 수 없어요. 물론 이 커플에겐 딱 한 번, 따뜻한 밥상이 존재하죠. 그건 둘이 처음 만나서 소리를 담으러 간 곳에서 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이예요. 너무 밥을 많이 담아서 도무지 다 먹을 수 없을 것 같이 수북히 밥이 쌓여있던 밥상. 밥상은 그 사람의 마음까지 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외롭고 차가운 밥상만 있는 건 아니죠. 따뜻하기로 말하자면, 영화 <집으로>의 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을 빼놓을 수 없죠. 뭐, 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프라이드 치킨 대신 닭백숙을 먹게 되긴 했지만, 사실 이것만큼 따뜻한 밥상이 있을까요. 아마 꼬마는 이게 얼마나 행복한 투정이였는지, 좀 더 자란후에 알게 되겠죠. 우리가 뒤늦게 엄마가 차려주시던 밥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처럼요.

영화 속 음식은, 때론 계급을 나타내거나, 계급 갈등의 원인을 상징하기도 해요.영화 <올리버 트위스트>에서는 올리버는 언제나'구석에나 가서 먹어' 라는 얘기를 듣죠. 고아로 자란 그에겐 그만을 위해 제대로 준비된 식탁은 없어요.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 <의식> 역시 음식으로 인한 계급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이 영화는 부르주아 가정에서 일하는 하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녀는 언제나 주방에서 급하게 밥을 먹고, 주인이 부르면 황급히 뛰어나가죠. 이렇게 주인집 가족들과 소피의 갈등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보다 조금씩 증폭되고 영화의 말미.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죠.

물론 영화 속 부엌은 보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어요. 영화에선 미래사회를 보여줄 때 자주 등장하는 것중의 하나가 최첨단의 부엌이예요. 영화 <아일랜드>도 그렇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경우도 그렇죠. 특히 전 '빵굽는 광선검'이 기억에 남아요. 커다란 식빵을 자르면서 동시에 굽는다? 생각만해도 신나는 일이죠.

어쨌든 현실에서 부엌은 조금씩 변하고 있어요. 외식문화가 발달하다보니, 이제 음식을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일은 드물죠. 사실 요리가 취미가 아니라면, 굳이 음식을 만들 일은 없어진 것 같아요. 맛있는 음식점들이 즐비하고 우린 돈만 있다면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우리의 삶은 너무 밋밋하고 재미없죠.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뮌헨>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중의 하나는, 암살자 에브너의 모습이예요. 집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채, 불안한 모습으로 암살범을 쫓고, 쫓기는 그는 언제나 모델 하우스의 주방처럼 멋지게 차려진 주방을 창문 너머에 서서 바라보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상관이 그에게 다가가 이렇게 얘길해요. '저런 주방이 있었으면 좋겠군. 돈이 많이 들겠어. 하지만 가정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야' 라구요. 그가 말한 주방이란 우회적으로 따뜻한 가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겠죠. 전 이 부분을 보면서 역시 스필버그의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그의 영화는 언제나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부엌이 작든, 크든, 우리의 밥상이 좁든 넓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우린 그 앞에 앉아 하루의 일과를 이야기할 누군가가 있고, 그/그녀와 함께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면 되는 거죠. 아. 그런데 문득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조제의 달걀말이를 좋아하던 츠네오의 모습과 그들의 밥상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조제는 아직도 혼자 밥을 먹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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