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와 박하사탕
글: 정영선
2002년 10월 28일
저는 지금 한나라당사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런데 저기, 낮에 보이지 않던 불빛이 보이는군요. 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농성중인 유가족들의 모습입니다. 아, 오늘같은 날씨에 얼마나 추울까, 갑자기 마음이 짠해집니다. 그런데 그 순간,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난 버스를 놓칠새라 얼른 올라탑니다. 속없는 내 발걸음을 따라 사람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집니다. 무책임한 사람들, 문득 미안해집니다.
<민들레>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1999년 빨간눈사람이 제작한 이 영화는 KBS 일요스페셜에서도 방송이 됐었죠. 저는 상영관에서는 보지 못하고 TV로 시청했는데, 그 때의 저릿저릿한 느낌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거칠게 말하자면, 유가협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 ‘의문사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해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한많은 어버이의 삶’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차마 말로 다하지 못한 그들의 아픔이 영화 속엔 촘촘히 담겨져 있습니다.
1999년. 개봉된 또 한편의 영화가 있었습니다. <박하사탕>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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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은 권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시대의 상처를 설명해줬습니다. 폭력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줬으니까요. 그래서 편협해지던 내게 다른 얘기를 들려준 거죠. 물론 그 영화는 모범생의 답안지처럼 너무 깔끔했습니다. 물론, 오답이 있었을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난 찾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건 마치 개정판 이전에 교과서에 실렸던 시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일테니까요.
시대를 기억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떼어놓는 것과 연장된 현재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전자는 쉽고 후자는 어렵습니다. 우리들에게 지나간 시대의 기록이란 딱 <박하사탕>만큼이었으면 좋을 기억들입니다. 자조적인 웃음도 묻어나고, 씁쓸한 고백도 있고, 용서받을 만한 이유들도 있는 과거 말이죠. 하지만 <민들레>는 현재 여전히 곪고 있는 상처입니다. 진물이 나고, 잘 아물지 않고 덧나기도 쉽죠. 나와는 상관없는 일 같기도 하고, 사안도 복잡해서 외면하는 게 속편한 일이죠. 모두는 내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겠지만, 시대에 대한 책임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건 이 땅에 사는 자들의 숙명과도 같은 게 아닐까요. 나를 감싸고 있는 이 공기가 이 시대의 것이라면 난 그 공기와 호흡을 해야겠죠.
그런데 쓰고 나니 맛있는 음식 이야기가 빠졌군요. 어쩐다... 혹시 이 칼럼을 읽기 전 맛있는 요리 이야기를 기대하신 분이 있다면, 그래서 실망하셨다면, 대신 맛있는 중국호떡을 하나 사드리죠. 왠 중국호떡이냐구요? 한나라당사 앞 버스정류장에 중국호떡집이 하나 있는데, 맛이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국회와 한나라당사를 지키는 공익근무요원들과 의경, 전경, 투쟁 나온 아저씨 아주머니들까지 줄을 서서 사 먹는답니다. 못 믿으시겠다구요? 그럼 한 번 놀러오세요. 그리고 오시는 길에 요즘 여의도에선 무슨 일이 이슈가 되고 있나 창문 너머로 고개도 돌려주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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