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영화이야기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 빅맥 시키신 분!


글: 정영선
2002년 12월 11일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패스트푸드점이라는 곳을 알게 된 게 말이죠. 집 근처에 롯데리아가 있었는데, 셀프서비스라는 (고객에게 일을 시킨다는 그 경이적인 발상!)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 나이때야 그저 '신기하고 새로운 무엇'이라고 느꼈지만요. 이후 제 삶 속엔 맥도날드, KFC, 버거킹들이 차례로 들어왔습니다. 바삭바삭한 프라이드 치킨과 보기만 해도 흐뭇한 와퍼. 게다가 다채로운 장난감들. 아직 키덜트 성향을 벗지 못한 저는 가끔 맥도날드에 진열된 장난감앞에 멈춰 서곤 합니다.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시사회장은 미리 배포된 초대권 덕분인지 예상보다 사람들이 덜했습니다. 작년 기자 시사회때는 작은 소란이 있었습니다. 주최측이 기자들의 소지품 검사에 나선 것이죠. 불법 촬영등을 우려해 본사에서 내려온 지침이라나요. 사실 기분 나쁜 일이죠. 기자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가정한 것이니까요. 결국 기자들과 주최측간의 마찰이 일어나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작년을 우려해서인지, 해리포터 복장을 한 안내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카메라 없으시죠?' 하고 묻더군요. (지난 번엔 가방을 열고 검사했습니다.) 치사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제3세계 변방국가에 사는 힘없는 관객이 해리포터 같은 메이저급 영화를 공짜로 보는 대가려니 해야죠.

속편은 보다 음험해졌습니다. 음모는 보다 사적이 됐구요. 3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동안 흥미 진지하게 영화 속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물론 영화를 보는 재미란 개인적인 것이라, 함께 본 선배는 열심히 졸더군요. 나와서는 전작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다며 투덜대구요. 물론 전작보다 나을 건 그다지 없었습니다. 이미 모든 것들이 보여진 터라 새로울 게 없었거든요. 그저 눈요깃감으로 충분한 판타지였죠.

아쉬운 건 거기 있습니다. 해리포터의 텍스트는 너무나 빈약합니다. 우리 시대의 신화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느낌이죠.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주인공 해리의 캐릭터만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해리가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 도착한 순간 '집에 왔다!'고 환호성을 지르는데, 이는 성장기 아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에서만 자아정체감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학교에서의 해리와 집에서의 해리의 모습은 천지차이입니다. 자신이 인정받는 곳에서는 자신감에 넘치지만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곳에선 쉽게 의기소침해집니다. 현실에 무력하고 개선의 의지를 갖지 못하는 것이죠. 관객층인 아이들 역시 이를 통해 자신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의지보다는 자신에게 찾아올 '마법 같은 행운'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구요.

이미 상업적으로는 검증받은 원작을 그대로 영화에 옮기다보니 영화는 각종 디테일들이 넘쳐납니다. 다양한 캐릭터들과 눈을 뗄 수 없는 신기한 이벤트의 잔치처럼 보이기도 하구요. 덕분에 정작 해리포터 내부에 대한 비판이나 논의보다는 소설가 조앤 K. 롤링을 둘러싼 가십성 기사들과 해리포터 열풍이 불러온 팬덤현상, 그리고 부가적으로 생산된 해리포터의 캐릭터 상품들만이 넘쳐납니다.

저는 영화 속에 차려진 푸짐한 만찬을 보다가 문득 맥도날드에서 본 생일잔치가 생각났습니다. 폴라로이드 사진기가 터지고, 수북히 쌓인 햄버거, 프렌치 프라이, 애플파이, 프라이드 치킨 앞에서 꼬깔모자를 쓴 아이들이 열광합니다. 처음부터 맥도날드의 성장엔 어린이층을 공략한 전략이 단단히 한 몫을 했습니다. 당시엔 그 누구도 이렇게 큰 잠재시장이 되리라곤 미처 생각치 못했던 거죠. 해리포터의 공략 역시 적절해보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신화는 이미 낡은 것이 됐고, 어른들이 만들어낸 계몽적인 동화는 더 이상 영악한 아이들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새로운 무언가의 출현을 아이들은 열렬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조지 리처는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라는 개념을 통해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미국 사회와 그밖의 세계의 더욱 더 많은 부문들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 이라고 말합니다.

해리포터 역시 폭넓은 의미의 일종의 맥도날드화가 아닐까요. 물론 장점도 많고,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낯설고 적대적으로 보이는 세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친숙한 환경으로 편안함을 주고, 그곳에서 원하는 것들을 빠르고 손쉽게 얻을 수 있죠. 하지만 그 왕국은 겉모습 뿐입니다. 보기엔 안락하고 기분좋은 꿈의 궁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왕국의 의자는 빠른 회전을 위해 20분 이상은 앉아 있기 힘들도록 고안된 것입니다. 먹음직스러운 크기로 인해 출시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빅맥 역시, 푸짐하고 큼직한 양만 강조됐을 뿐 영양가나 질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공통점 하나. 이를 통해 한 문화의 산물이 다른 문화로 더욱 쉽게 전파되는 것이죠.

해리포터는 너무나 매혹적인 판타지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린 무얼 아쉬워해야 하는 걸까요. 사라져가는 우리 것에 대해 걱정하는 다소 국수적인 생각을 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아이들의 꿈과 환상마저 획일화되는 세계화에 대한 우려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 그런데 낯선 도시의 거리에서도 맥도날드의 '골든 아치'를 보면 편안함이 느껴지는, 이 길들여진 습성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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