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래식 : 그 맛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
정영선 | 2003년 01월 29일
조회 5613
<클래식>을 보고 난 후에 느낌은 이렇습니다. 일단 영화 <색즉시공>을 본 후의 느낌과 비슷하다는 것,
그리고 그야말로 기분좋은 '클래식'한 영화라는 것.
먼저, 클래식한 이 영화에 대해 살펴보죠.
영화는 처음부터 모든 전제를 밝히고 시작합니다. 영화의 도입부, 지혜(손예진)는 엄마의 닭살돋는 편지 한 줄을 읽고 난 후 '그래.. 클래식하다고 해두지'라고 말합니다. 마치 감독이 관객들에게 '너희가 닭살인 거 나도 알지만, 이게 바로 클래식한 사랑이라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 때부터 영화의 모든 유치찬란한 상황과 대사들은 정당화되고 용서가 됩니다. 뭐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사랑이란 원래 유치찬란한 모든 요소들에 기반하고 있으니까요.
영화는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본 사랑이야기로 시간을 돌립니다. 여름방학,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서 겪었던 자신의 경험이었든, 따뜻한 방에 엎드려 읽었던 순정만화 주인공의 이야기였든, 아니라면 깜깜한 방에서 혼자 펑펑 울며 보았던 옛 멜로 영화의 한 장면이었든 <클래식>은 우리 내면에 깊게 자리잡은 사랑의 본질을 건드리죠.
툭하면 아프지만, 그래서 더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자와, 그 여자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묵숨이라도 내놓겠다는 남자. 그리고 이들을 갈등하게 만드는 우정. '들장미 소녀 캔디'가 아직까지 가슴속에 애잔하게 남아있는, 전국방방곡곡의 '마음만은 소녀, 소년들'에게 이 영화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사랑을 보며 이들의 사랑이 유치하다고 웃어버릴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마 흔치 않을 겁니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사랑에 대해 공통분모로 지니고 있는,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클래식>은 참 어려운 시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모두가 다 아는 익숙한 주제라 새로운 무엇이 나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죠. 하지만 너무나 많이 들어서, 너무나 많이 봐서 뻔하고 심심할 것 같은 이 이야기가 영화에선 과거와 현재라는 새로운 형식의 틀 속에 정말 맛있게 조리돼 있습니다. 바로 훌륭한 요리사, 곽재용 감독을 만났기 때문이죠. 여기에 영화 <색즉시공>을 본 후의 느낌과 비슷한 이유가 있습니다.
<색즉시공>의 윤제균 감독이 그랬듯, 곽재용 감독 역시 너무나 정확히 관객의 코드를 읽어내고 있습니다. 관객들을 어떻게 웃기고 울려야 할지, 그리고 어디서 웃기고 울려야 할지를 알고 있다는 거죠. 또한 완급조절에도 탁월해서 카타르시스를 줘야 할 부분에서는 관객 스스로가 동화될 수 있도록 충분한 호흡을 줍니다. 대사 없이 음악과 아름다운 영상으로 채워지는 이 쉼표에서, 우리는 영화가 말해주는 것 이상의 스스로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 이상을 보게 되는 것이죠.
 그는 복선에도 탁월합니다. 모든 사건들은 개연성을 지니고 있고 관객을 충분히 납득시킨 후 넘어갑니다. 특히 월남전의 상황은 두 번 반복되는데, 두 번 모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같은 상황이 발생하죠. 이 역시 보다 다층적으로 읽어낼 '꺼리'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멜로 영화죠. 어눌한 안성기의 표정과 빨간 공중전화박스 그리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던 눈 오는 날의 까페는 지금도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아, 마지막에 아내와 똑닮은 딸과 함께 있던 공원의 벤치는 또 어떤가요. 여기서 울지 않는다면 정말 그는 강심장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과연 있을까 싶은 사랑이지만, 그래도 그 사랑이 좋은 건 오랜 시간 잊지 않고 간직해왔기 때문일겁니다.
<클래식>의 맛은 바로 이런 것이겠죠. 아주 근원적인 것 말입니다. 너무나 오래전부터 익숙해서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그리운 엄마의 손맛같은 거 말이죠. 어릴 적엔 세상에서 엄마가 해준 음식이 제일 맛있습니다. 하지만 자라면서 세상엔 수없이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엄마의 손맛이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손맛이 그립고 마냥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엔 우리가 꿈꾸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수천, 수만가지의 사랑이 있겠죠.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달콤하고 보다 매혹적인, 맛도 모양도 색깔도 다른 사랑들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겠지만 그 사랑들이 추구하는 본질은 아마 같을 겁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부터 이미 익숙해진 엄마의 손맛처럼, 가슴 설레이고 순수한 사랑의 기억은 보다 근원적인 것일테니까요. <클래식>은 그 꿈같은 사랑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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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영선
모든 것들엔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물론 병조림이냐 통조림이냐에 따라 유효기간은 다르죠.
그 날 개봉해서 먹어야 상하지 않는 음식이 있고,
적어도 몇 년간은 안심해도 되는 음식이 있듯이요.
희망. 꿈. 사랑. 미래. 용기..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
당신에게 유효기간이 남아있는 건 무엇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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