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킬러들의 수다> 장진의 세계로 빠져들든지 말든지


글: 강병융
2001년 11월 09일

필자는 예술을 이해하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첫 번째는 리얼리즘으로 이해하기, 두 번째는 모더니즘으로 이해하기. 이는 달리 말하면, 일상의 눈으로 작품을 보느냐, 아니면 작가의 눈의 작품을 보느냐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리얼리즘으로 이해한다면, 일상의 눈으로 본다면, 정말 답답하고 짜증스러울 것이다. 피카소의 그림도 마찬가지이고, 하루키의 소설([상실의 시대]는 빼고)도 그럴 것이다. 대신 소위 말하는 잘 그려진 그림들은 리얼리즘으로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 '리얼리즘적이다'라는 것은 소위 일상과 얼마나 표면적으로 유사하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진(A) 감독의 <킬러들의 수다>는 관객들의 찬반 양론이 극단적일만 하다.

부연해보면, <킬러들의 수다>의 경우, 철저히 모더니즘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관객에게 즐거운 일다. 물론 연출자에게도 즐거운 일일테지만. 그 안에는 극단적인 감독의 시선과 가치관 그리고 표현방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관객이 이 작품을 일상의 잣대로 측정한다면 영화는 정말로 보잘 것 없어질 뿐이다. 또한 이것은 마치 <델리카트슨>같은 영화를 일상의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무식한 행위로 치부될 수 있다.

<킬러들의 수다>는 처음부터 이것은 우리의 일상이 아니니, 영화 속 세계로 인식해달라고 호소한다. 그것은 원빈의 첫 나레이션으로 증명된다. 즉, 영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4인조 남성 킬러'라는 설정으로 문을 연다. 그 순간 관객들은 일상에서 존재했던 고정관념을 접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 관람이 수월치 않을테니. 영화 속의 수많은 장치는 계속 장진식으로 굴러간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인간형(킬러뿐만 아니라 경찰들 그리고 악당들까지), 그리고 얼토당토않은 설정들(갑작스런 연극식 대사들, 영어 말장난) 심지어 결말까지. 이런 식으로 <킬러들의 수다>는 일상의 규칙이 아닌, 장진의 규칙을 돌아간다. 이를 수용하는 관객들은 당연히 그의 작품, 그의 세계에 찬사를 보낼 것이고, 반면 그의 세계를 인정할 수 없는 관객의 경우, '뭐, 이런 황당한 영화가 어디있어?'라고 내뱉을 것이다. 그러니 <킬러들의 수다>의 경우 관객 반응은 극단적으로 이분화될 것임 분명하다. 그것은 장진이라는 감독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 즉 영화를 모더니즘적으로 보느냐, 리얼리즘적으로 보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영화를 보는 방식은 제각각 다를 수 있다. 어느 것이 옳다고 하거나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름의 세계를 표출할 줄 아는 감독이 하나 둘씩 늘어나는 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즐거운 일이다. 이미 김기덕이라는 모더니즘 작가를 우리는 얻었다. 그리고 그의 세계가 확고하다는 것은 이미 세계 영화계가 입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진 월드가 생기는 것에 대하 필자는 환영한다. 제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길 바라면서.

덧말, 혹자는 모더니즘 성향의 작품을 보면서 리얼리티를 찾는다. 그런데 명백히 말하고 싶은 것은 모더니즘에서 발견되는 리얼리티 역시 모더니즘 세계 속에서 입증하면 그만이다. 자꾸 리얼리즘의 잣대로 모더니즘의 리얼리티를 측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This article is from http://www.cinel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