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우리영화 <링>과 스즈키 코지의 원작소설 비교 글: afdf 1999년 09월 01일
<링>은 확실히 특별한 소설이다. 이 작품은 초반부터 "서스펜스/스릴러" 소설의 형식을 철저하게 차용한다. 비디오에 담긴 "저주의 명령"의 정체에 대한 미스터리, 일주일이라는 한정된 시간, 그리고 정답없는 퍼즐을 풀어가는 주인공의 생사를 건 모험.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장을 덮을 때 독자들은 완전히 뒷통수를 맞는다. 등골이 서늘해 지고, 정체 모를 공포가 엄습한다. 그리고 급기야는 우리의 잠자리까지 뒤숭숭해진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공포와 호흡을 휘어잡는 서스펜스의 절묘한 조화. 그것이 <링>이 간직한 진정한 매력이다. ![]() 1. 아사카와 vs 홍선주 "아사카와"는 소설에서, "홍선주"는 영화에서 죽음의 비디오가 던진 저주를 풀기위해 동분서주하는 주인공의 극중 이름이다. 이 두 인물은 모두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슬하에 귀엽기 짝이 없는 딸을 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아사카와"는 男性이고, "홍선주"는 女性이다. 이러한 성별의 차이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소설을 읽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죽음의 비디오를 만든 장본인이며, 원한을 품고 죽어간 사람(소설에서는 "사다코", 영화에서는 "은서")은 여성의 성격과 외모에 남성의 성기를 지닌 中性인이였다. 또한 죽음의 비밀을 풀어가는 두사람은 모두 남성이다. 이들은 난무하는 연결고리들과 상황마다 머릿속을 가로 지르는 영감을 바탕으로 죽음의 저주에 담긴 수수께끼를 풀어간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문제해결 방법은 논리적이고, 다분히 이성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소설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면,영화는 충동적이고 감성적이다. 논리적인 추리보다는 "두려움"과 "공포감"이라는 감성에 접근해 있다. "선주"(신은경)와 "최열"(정진영)은 원한을 품고 죽은 귀신 "은서"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게 된다. 즉, 사건을 파헤쳐 가면서 "은서"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것이 "은서"와의 영적 교감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설정이다. 결국 "선주"와 "최열"은 정신적 교감상태를 통해 "은서"의 과거를 시각화하고, 비밀을 풀어내게 된다. 영화는 이렇듯 지극히 직관적이고 충동적인 플롯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소설과 영화의 차이를 이해한다면, 소설/영화에서의 남/여의 차이는 쉽게 설명된다. 즉, 사다코(혹은 은서)가 남성의 생식기에 여성의 신체와 심리를 지닌 중성일때, (영화에서의)"은서"와 정신적인 교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소설처럼 "두명의 남성"보다는 "한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에게 좀 더 강한 심리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은서"는 생식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여성이였기 때문에, ("여성과 여성의 심리적 교감"이란 측면에서) 영화에서 사건 해결을 위한 영적교감은 그 타당성을 획득하기 용이해지는 것이다. 남녀간의 차이에서 오는 이러한 문제해결 방법의 차이는, 나아가 활자문화와 영상문화가 지니고 있는 특성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것은 장황한 서술이 가능한 소설과 상영 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는 영화의 장르적 특성의 차이인 것이다. 특히나 <링>의 경우 소설에서 장황한 서술로 표현되는 과거의 회상, 혹은 서술 장면들을 영화속에서는 영적 교감으로 시각화되는 "몽타쥬"로 처리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데, <링> 역시 그러한 "몽타쥬"를 통해 관객에게 공포영화의 매력이기도 한 쇼킹한 비쥬얼을 선사하고 있다. 2. 다카야마 류지 vs 최 열 둘다 괴팍함. 말(言)로는 세상의 종말을 보고 싶다고 하지만, 그 내면은 아무도 모름. 죽음의 비디오가 지닌 비밀을 푸는 진정한 해결사. 강인한 정신력, 강력한 리더쉽의 소유자. 미혼. 이 두사람은 소설과 영화에서 각각 "아사카와"와 "홍선주"를 도와(실제로는 이끌어 가며) 문제를 해결해 가는 인물로 등장한다. 소설이나 영화나, 이들이 가진 케릭터의 성격은 별 차이가 없다. 소설과 영화안에서 이들이 지닌 차이점은 바로 직업. "류지"는 대학교 철학과 조교이고, "최열"은 한때는 뇌수술의 권위자였지만 지금은 시체나 부검하고 있는 의사이다. 이러한 두사람의 직업적 차이는 이 두사람이 어떤 연유로 사건에 휘말리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한다. 우선 "류지". 그는 단순히 "아사카와"로 부터 도움을 요청받고 그 사건에 흥미를 목숨을 건 모험에 끼어든다. 어찌보면 그가 꼭 이 일에 뛰어들어야 할 당위성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구미가 땡긴다는 이유 하나로 목숨을 건다는 사실은 일반인의 시선으로 보기엔 허무맹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될수록 "류지"는 죽음의 퍼즐을 풀어가는데 더 할 나위없이 적당한 인물로 묘사된다. 즉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이런짓을 할 사람은 '류지'밖에 없다.."라는 암시를 반복/주입함으로서 "류지"의 사건 개입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열"은 어떨까? "최열"이 직접적으로 이 사건에 끼어들게 된 동기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 "선주" 조카의 시체를 그가 직접 부검했기 때문이다. 그 역시 부검한 시체의 死因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고, 때마침 "선주"가 그녀의 조카를 부검한 "최열"을 찾아 왔던 것이다. 어느 소녀의 죽음에 의문을 품던 두사람의 조우. 이런 상황 자체로 "최열"은 저주의 비밀에 뛰어들 수 밖에 없는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인물설정의 차이는 역시 소설과 영화라는 장르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소설속에서의 "류지"는 "아사카와"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류지"라는 인물에 대한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 그의 과거에 대한 서술/묘사가 자주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이러한 설정은 한정된 러닝타임을 생각할 때 불필요한 요소이다. 90분이란 제한된 시간안에 주변상황에 대한 묘사는 버리고 사건의 전개에만 주력하는 것, 이것은 또한 소설을 영상화하는 대부분의 영화가 추구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이러한 설정의 변화가 독자/관객에게 어떠한 반응을 불러 일으킬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없이 소설을 그대로 영상화한다는 것은 "각색"이라는 묘미를 찾는 관객들의 기대에 실망을 주는 행위이다. 소설과는 다른 색다른 요소를 배치하여 영화만의 또 다른 재미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소설을 뛰어넘는 또 다른 재미를 창조할 약속된 열쇠이기도 하다. 3. 요시노 vs 김기자 경력 10년 이상의 베테랑 기자. 바쁜 업무중에도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섬에 고립되어 있는 "아사카와,류지"/"홍선주,최열"을 위해 사건의 해결에 실마리가 되는 단서들을 제공. 그러나 두사람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저주의 비디오"는 끝끝내 보지않음 비디오의 저주를 푸는 데 없어서는 안될 제 3의 인물들. 일에치어 사는 우리시대 셀러리맨의 전형. 그러나 타인을 위해 자신의 안일함을 포기하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들. 사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소설/영화에서의 차이점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단지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소금과 같은 양념의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요시노"와 "김기자"가 모두 기자이긴 하지만, 두사람의 처지는 좀 다르다. 소설속의 "요시노"는 "아사카와"와는 라이벌 관계에 있는 다른 잡지사 기자이다. 요시노 역시 의문의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사카와"와는 달리 의문사한 4명의 젊은이들을 연결하는 열쇠고리를 찾지 못하였다. 결국 그가 "아사카와/류지"를 돕게 된 이유는 의문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는데 있다고 할까? 반면 "김기자"는 "홍선주"가 있는 신문사의 선배기자이다. 인정 많은 이웃집 아저씨같은 "김기자"는 글자 그대로 후배를 위해 도움을 준다. 같은 인간이자 후배가 부탁하는 일을 거절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은 정말 맘좋은 옆집 아저씨 그모습 이다. 지금까지 원작소설 "링"과 우리영화 "링"간에 자리잡은 차이점들을 나름대로 소개해 보았다. 활자가 만들어 내는 시간/공간적 범위는 영상이 포함하는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활자가 만들어 놓은 "이야깃거리"를 영상으로 리메이크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으며, 그 인기또한 원작을 능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에니메이션의 경우가 그러한데, 이것은 잉크 묻은 만화가 지니지 못한 시간의 연속성, 즉 종이위의 컷과 컷사이의 불연속성의 한계를 능가하는 영상매체의 특성이 큰 장점으로 부각되기 때문이다. 어떤 한가지 대상을 상상하는 것과, 그것이 직접 시신경을 통해 우리의 뇌까지 전달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막연한 상상력이 외부에 의해 구체화된다는 것은 새로운 충격이며 신선한 반란이다. 이제, 우리의 머릿속을 맴돌던 "죽음의 비디오"가 영화속 스크린을 통해 우리의 뇌리속에 구체화된다. 영화속에 그려진 "비디오" 영상을 보고 우리도 그 죽음의 덫에 빠져들지, 그렇지 않을지는 당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영겁의 세월동안 잠들어 있던 당신의 본능적 의지에 따라... This article is from http://www.cinelin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