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살인의 추억> 메스가 예리한 살인의 해부


글: 이종열
2003년 04월 26일

버스는 일산의 한적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운전 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선 철지난 가요가 흐르고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비스듬히 보는 차창 밖 심심한 논밭과 망막 잔상에 남아있던 <살인의 추억>의 안개. 그것의 혼합은 갑자기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만들어냈다. 형사의 슬픔, 피살자의 슬픔, 당시를 살아간 사람들의 슬픔을 생각한다. 기형도 시인이 그랬듯,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쏟아질 것만 그 슬픔들이 온몸 가득하다.

온 국민이 들떠있던 86 아시안게임을 며칠 앞두고 일어난 첫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6년에 걸쳐 계속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실화로 만든 <살인의 추억>은 감상적인 제목과는 달리 모두가 잊고있었거나, 모르고 있었거나, 감추고 싶어했던 뼈아픈 과거의 한 사건을 추억케 한다. 미해결인 상태로 남아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의 치부를 건드리고 있는 이 사건은 개도국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사실은 후진국인 한국의 부끄러운 실상을 들여다보게 한다. 봉준호의 이 꼼꼼한 보고서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화성연쇄살인 사건 이후의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최근의 대구지하철 참사 등이 그것을 말해준다.

연쇄살인사건이 터졌음에도 병력은 모두 시위 진압에 나가서 없고, 유일 물증을 검사할 기구가 없어 미국까지 가야하고, 민방위 훈련한답시고 설치고…. 이 후진 나라,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되어 돌아가는 이 나라에서 범인이 잡힐 리는 당연 없었던 것. 범인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살인의 추억>은 실화를 객관적으로 전하는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틈을 봉준호의 절정에 달한 연출력이 작동한 픽션으로 잘 메워놨다. 또 화성살인사건 실화를 극화하면서 생길 장르적 마이너스 요소(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점)를 감독은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면서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연출의 깊이, 스릴러적 쾌감, 긴장 속에서 피어나는 슬픔을 동반한 코믹적 기운, 연기의 절정, 치밀한 공간 설정, 영화에 유기적으로 기능하는 뛰어난 영상언어…. 어느 하나 흠 잡을 데 없다.

이 땅에 드디어 진정한 범죄 스릴러가 탄생해 매우 가슴 벅차다. 또 그 스릴러가 사회적 폐부를 건드리고 있어 더더욱 고맙다. 오래 기다렸고 기대 많이 했음에도 그 이상의 성과를 보여준 이 영화에 거듭 큰절을 올린다. <지구를 지켜라!> 때는 가만히 있었지만, <살인의 추억>에 안 좋은 소식이 들린다면 기꺼이 영화운동에 나서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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