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그녀에게 말 걸기
글: 윤현호
2003년 05월 01일
 |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려던 마르코(다리오 그란디네티). 사랑하던 리디아(로자리오 플로레스)가 투우 경기 도중 사고를 당해 코마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이젠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 그의 사랑이 신에게 시험받는다 해도 어쩔 수 없어요. 결코 눈을 뜨지 않을 그녀에게는 단 한마디의 말도 걸 수 없잖아요. 그렇다고 희미하게나마 이승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 그녀를 떠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니까요... 마르코란 남자. 그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서 평범한 우리들이 보입니다.
같은 상황에 놓였다는 이유로 베니그노와 마르코는 친구가 됩니다. 한수위의 사랑을 하고 있는 베니그노가 마르코에게 말합니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보세요.'
1. 등 떠밀지 않기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이야기에 미스테리를 묘하게 숨겨 두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영화에는 두 개의 의문점이 등장합니다. 알리샤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최고의 수혜를 얻은 자는 다름 아닌 베니그노입니다. 알리샤의 사고에 베니그노가 관여가 되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알라샤를 자신에게 가둬두기위해 베니그노가 사고를 조작한 거라면 그의 사랑은 빈껍데기로 추락하게 됩니다.
마르코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리디아는 사고를 당하기 직전 전남편과의 재결합을 추진하던 중이라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혼수상태에 빠진 리디아를 옆에서 돌바줄 명분이 마르코에겐 없게 됩니다.
만약 미스테리를 보강하고 싶었다면 이런 단서들을 좀더 파고들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모도바르는 살포시 담아 두기만 할뿐 더 이상의 진전을 거부합니다. 여운을 남기더라도 직접 관여해서 관객들의 등을 떠밀지 않습니다. 마치 대답 없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난처한 상황처럼 관객들을 스스로 청자가 되고 화자가 되어야 하는 거죠.
2. 그녀에게 말 걸기
만약 알모도바르가 야심을 덜 부렸다면 <그녀에게>는 딱 절반씩 갈려져서 두 개의 영화가 나왔을 법합니다. 베니그노의 편집증적인 사랑과 마르코의 정적인 사랑을 다룬 각각 완전히 다른 성격의 영화 두 영화 말이죠. 식물 인간을 사랑하고, 일종의 시간(屍姦)이라 할 수 있는 숨결 없는 대상과 성적인 관계를 가지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임신까지 되는 상황이 줄지어 벌어지는 베니그노의 이야기는 무척 알모도바르 적입니다. 독특한 인물들을 그보다 더 독특한 사건으로 몰아넣는 그가 딱 환영할 만한 스타일이죠. 사랑하는 여자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방관자가 되버리는 마르코의 이야기는 이제는 점잖은 영화를 만들 법도 한 알마도바르에게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두 개의 이야기를 하나의 화폭에 담아 두고 있지만 인위적으로 한 이야기로 몰아가지는 않습니다. 같은 시각과 공간을 공유하지만 흘러가는 두 인물은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습니다. 둘다 자기식대로의 결말을 맞이하는 것도 그 이유겠죠. 그녀의 내면을 향해 끝까지 말을 걸지 못했던 마르코는 결국 그녀의 죽음 앞에서조차 냉랭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열적인 사랑를 하던 베니그노 역시 그다운 결말을 맞이합니다.
헌신적이고 자신을 모두 내버리는 베니그노의 사랑이 이상적인 사랑일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극진히 간호하는 베니그노를 보며 자신의 부족한 사랑을 탓하며 자학하는 마르코를 보니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이 너무나 크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네요.
TIP
●●알리샤의 무용 선생님으로 나온 할머니는 찰리 채플린의 딸입니다.
●●베니그노라는 이름은 알마도바르의 친한 친구인 로베르토 베니니(<인생은 아름다워>의 감독, 배우)에게 가져왔다고 합니다.
This article is from http://www.cinel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