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사탕> 기억에 '후진기어'를 넣어라
글: 홍수진
2000년 01월 05일
감독 : 이창동
출연 : 설경구, 문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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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의 영화를 대할 때면 감독이 들려주는 음성화된 언어와 펜으로 친절히 안내해주는 문자화된 언어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영상적인 역동감이 중요한 영화에 있어서는 그의 이런 점이 지리할수도 있으나,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심장이 따가워지는 칠삭동이 영화와는 달리 잠을 자는 것처럼 고른 숨을 쉴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박하사탕은 50년대의 미군정시대로 매듭을 짓지 못한 채 지리한 롱테이크로 한숨을 짓게 한 '아름다운 시절'의 현재판이다. '아름다운 시절'이 역사에 의해서 구타당하는 개인의 삶을 살짝 들쳐내며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갔다면, 박하사탕은 특정화된 개인이 삶을 들쳐보되, 동시대의 관객들과 필름을 돌리는 활동사진과도 같으니 말이다.
기차 아래 깔린 레일
2시간의 박하사탕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소재는 기차와 그 아래 흔들리고 있는 레일이다. 기차는 달려야만 하고 레일은 피곤한 몸을 땅 아래 눕히고 몸 위에 달려야 할 것들을 기다려야만 한다. 여유 없이 달려오는 크고 작은 역사와 그 역사아래 저리 눕고, 이리 누우며 지리한 삶을 지탱하는 개인의 삶처럼 말이다. 레일은, 즉 개인은 순환이 지속되기에 기차의, 역사의 사정거리를 벗어날 탈출구가 없다.
또하나의 순환체계인 톨게이트처럼 입,출구가 뚫려 마음대로 내다닐수 있는 것도, 되돌아 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기차가 올라타는 대로 방향이 결정되어 버린다. 레일과 같은 개인 김영호, 기차와 같은 우리의 역사이다. 역사는 흘러가되 절대로 '내가 널 곧 망가뜨릴텐데, 아파서 어떡하나?' 따위의 말은 내뱉지 않는다. 즉, 후진의 속성을 제거한 기차는 레일를 내려다보지 못한다. 우리가 지켜보았던 그간의 역사처럼 말없이, 소통 없이, 재빠른 적응능력을 요구하며 단지 흘러가는 것이고, 달려가는 것이다.
김영호처럼 무수한 후회의 일들을 이미 저질러 버리며 마음을 칼처럼 세운 인간에게 후진의, 되돌아감의 욕망은 당연한 것이다. 김영호가 '1985년 기도'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며 외친 마지막 군대 구호인 '뒤로 돌아!'는 1979년의 첫사랑을 만난 평온했던 소풍인지, 오발탄으로 소녀를 죽인 1980년 봄인지, 아니면 기억할 수 없는 자신의 내면 어딘가인지... 모르겠다.
삶은 아름다운가?
이렇게 복잡하게 자신을 핥고 간 수많은 인간들 중 하나를 죽이기 위해 총을 준비한 김영호는 흡혈귀같은 사채업자를 죽일지, 그를 배신한 동업자를 죽여야 할지, 이혼을 한 아내를 죽여야 할지 자신을 짓밟은 인물들을 열거하기도 힘들어한다. 그의 앞에서 흐른 시간동안 그가 그렇게 괴롭힘을 당했던 것처럼 그 또한 누군가들에게 죽임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첫사랑은 마치 여신처럼 -김영호가 삶의 무게에 힘겨워 할 때마다 첫사랑이 지워버리지 못할 대상이 된 것처럼- 하루에 천 개의 박하사탕을 싸며 산 카메라를 버리지 못하고 김영호의 옆에 또다른 레일처럼 누워있다. 공단식당 아래서 김영호에게 자전거를 배우고 시간이 흘러서는 젊은 운전교사에게 자동차를 배우는 아내에게 김영호는 일생동안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를 둘러싼 사랑과 아픔은 그가 가진 묵직한 열쇠꾸러미처럼 그렇게 남아 있다.
87년 여름, 단풍이 그려진 정치범의 일기장을 손에 쥔 채 세면실에서 고문을 하다 그는 중얼거린다. '삶은 아름다운가?'
79년 여름, 처음임에도 낯설지 않는 철교와 강들,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 속에서 익숙함을 느끼며 후에 자신이 죽을 자리에 고개를 눕히며 눈물을 흘리는 김영호는 마음속에 아마 87년때처럼 동일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삶은 아름다울 것인가?'
박하사탕의 마지막 sound는 이 영화의 모티브인 '기차소리'이다. 기차와 레일이 척척 달라붙으며 배를 맞닿고, 머리를 맞닿으며 지르는 음흉한 교성소리와 같은 씩씩한 역사와 버거워하는 개인의 소리이다. 김영호가 피곤한 몸을 땅아래 눕히고 몸위에 달려야 할 것들을 기다려야만 하는 '레일'의 상태에서 육체가 쓰러짐으로써 벗어났다면 어딘가에서 그는 후진의 속성만을 가진 기차가 되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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