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칙왕> 이상한 이야기
글: 여임동
2000년 03월 01일
감독: 김지운
출연: 송강호, 장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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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제한의 속도로 달려가는 세상을 따라잡을 능력이 없어 보입니다. 실적은 바닥을 기고 상관의 헤드락은 그를 히스테리 상태로 몰아 붙입니다. 이른바 <실력사회>에서 그의 역할은 오직 패배자 뿐인 것 같습니다. 지하철 사이로 언뜻 비치는 그를 포함한 사람들의 얼굴들은 하나같이 굳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 또한 이 사회 어느 구석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헤드락을 당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삶의 기쁨을 선사할 공간은 그의 방으로 족합니다. 비디오 테입과 군것질 할 꺼리는 그의 삶을 유지시킬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하거든요. 물론 가끔 이 정글사회를 압축시켜 놓은 듯한 프로레슬링 경기를 보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또 그 재료들을 이용해 상상의 나래를 펴고 이 현실을 떠날 멋진 <꿈>을 꿀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우울하게도 사실 무척이나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모르게 우리의 꿈마저 현실의 공포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무의식의 세계 또한 헤드락의 공포스러운 체험을 간직하고 있으니까요. 임대호는 꿈마저 부지점장으로 대표되는 현실에 <저당> 잡혀있는 이 시대의 나약한 소시민에 불과합니다. 낮에는 능력있는 은행원으로 밤에는 화려한 레슬러로 변신하고 싶은 <슈퍼맨 콤플렉스>는 그저 현실의 강요일 뿐, 그의 꿈조차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임대호가 상상하는 사각의 링은 전적으로 꿈에 기대고 있습니다. `울트라 타이거마스크'의 화려한 기술, 슈퍼 울트라 봉봉은 오직 실현불가능 한 지나간 꿈에 불과합니다. 프로레슬링 그 자체도 허름한 체육관과 실력없는 선수들 그리고 조잡하게 공터에서 열리는 경기를 보면 아시다시피 이미 잊혀지고 사양길로 접어든 종목입니다. 이곳은 WWF가 열리는 미국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대호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현실논리와 유사한 구조를 띈 사각의 링은 그에게 꿈을 꾸는 대가로 <반칙>을 제안합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반칙 뿐입니다.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지만 <가면>을 쓴다면 멋진 레슬링 기술도 멋진 사랑고백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달콤합니까. 하지만 반칙과 가면이 뚜렷하게 증명하듯 지금 우리에게 꿈이란 <자아분열>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자 결국 이 삭막한 현실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할 것 같습니다.
영화 <반칙왕>은 결국 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을 벗삼아 그저 한바탕 웃음이나 짓자고 얘기합니다. 우리의 일상을 모델로 삼아 씁쓸하게 웃어보자고 말입니다.(사실 웃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지점장에게 복수하려는 임대호가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듯, 결국 엔딩장면에서 높은 빌딩들 사이를 가로 지르며 회사로 향하는 임대호의 일상은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꿈을 꾸며 발견한 것이 있다면 오직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힘없는 <분노> 뿐이죠. 영화 <반칙왕>이 매우 유쾌한 코미디이면서도 끝내는 씁쓸한 감정을 전해주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족: (많은 관객들이 이런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꼈느냐 마느냐에 따라 이 영화 의도의 성공/실패가 결정날 것 같습니다)
미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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