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일탈의 미로 :::

양유창 | 1997년 02월 01일 조회 4371
감독 : 홍상수
출연 : 이응경
구효서의 소설 [낯선 여름]을 영화화한다고 하였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역시 어떠한 플롯을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시나 레이먼드 카버와 로버트 알트만식 <숏컷>의 컴비네이션 같은 걸작이 탄생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영화는 그와는 달리 좀 더 낯선 어떤 것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난 후의 느낌은 대체로 적잖은 실망과 또한 꽤 심도깊은 기대감이었습니다. 신인감독의 처녀작이라는 사실을 전제로하면 이 작품은 꽤나 안정감이 있으며 극중의 어디에서건 영화의 힘을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그의 귀추가 주목되게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탓인지 영화를 관람한 후의 느낌은 대체로 '진지하지만 가볍다' 정도의 평이한 것이었습니다. 분명 이 작품은 우리 영화계에서 신선한 것이고 또 처음 시도되는 용기있는 결단이라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줄 만하지만 그만큼 아직은 서툰 면을, 어눌한 리얼리즘의 과부하에서 오는 부작용을 어느 정도 동반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너무나 일상적으로, 그래서 오히려 낯설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알지 못하는 몇몇 인물들이 각각 등장했다가 어느 한 순간 - 꿈 시퀀스 - 에 한데 모이더니 영화는 다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끝나버립니다. <애정만세>에서 보았던 현대 도시의 갇힌 욕망 출구찾기를 '요즘 영화의 어떤 경향'으로 만들어 버린 후 로베르 브레송과 오즈 야스지로의 고전적인 스타일을 결합하여 정적인 카리스마로 표현해내려한 이 영화는 그러나 <애정만세>의 통시적인 리얼리즘에 근접하지 못하고 있고, 브레송과 야스지로의 경우에는 어느 한쪽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기웃거리고만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통시적 리얼리즘의 포기는 국시적이지만 독자적인 것으로 정당화할 수 있고 브레송의 직시와 야스지로의 거리설정은 적절히 혼합하여 새로운 방향을 개진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대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물 중심의 이 영화를 보다 새롭게 해주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단편 소설같은 영화'라는 카피처럼 영화는 4개의 주요 단편들로 묶여져 있습니다. 첫번째는 효섭(김의성 분)을 위주로하는 두 여인과 3류 작가의 이야기, 두번째는 샐러리맨 동우(박진성 분)의 비극담, 세번째는 효섭을 좋아하는 민재(조은숙 분)의 삼각관계, 그리고 네번째는 동우의 아내이자 효섭의 애인인 보경(이응경 분)을 위시하여 그녀의 자아찾기 과정을 그려낸 것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따로 분리되어 각자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효섭을 사이에 두고 나머지 인물들의 관계를 밝히는 과정 속에서 각각 인물의 시점이 되어 서서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내러티브는 자유롭지만 플롯은 다소 경직되어 있는데 결국 이것은 극중의 등장인물처럼 변증법을 통해 하나로 승화됩니다.
클로즈업을 지양하고 롱 쇼트 및 롱 테이크를 즐겨사용하는 양식으로 인하여 영화는 리얼리즘을 확고히하려 합니다. 주로 사용한 픽스샷들과 거침없는 점프 컷, 피사체와 카메라와의 일정거리유지 등도 역시 영화를 제한된 범위 내에서 현실과 괴리되지 않는 일상매체로 인식하게 해주는 데에 공헌하는 요소들입니다. 동시대에 역시 인물 중심으로 영화를 찍은 왕가위와 타란티노의 영화가 각각 기술의 편린들과 내러티브의 재구축으로 이루어낸 성과였다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극도로 과장된 리얼리즘을 시간의 한계 속에서 극대로 끌어내는 방법을 통해 현대 영화의 또다른 경향을 이끌어낸 사례입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밝혀지는 이들의 관계는 이미 주어진 보기들에 알맞은 정답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골라내는 것처럼 영화를 보는 재미와 신선함을 북돋워주며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현대인의 관계의 미로를 하나씩 풀어가게 합니다. 등장인물은 모두 여기저기에서 소외되어 있고 그들은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을 알고는 있지만 각각 그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효섭은 두 여자의 사이에서 방황하고, 동우는 다시 아내를 그리워하기 시작하며, 보경은 무작정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려 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들에는 그다지 운이 따르지 않습니다. 동우의 우연한 하룻밤 정사에서는 콘돔이 찢어지고, 민재는 효섭을 잃고, 효섭은 여기저기에서 따돌림 당하며, 보경의 눈에 비치는 것은 악몽 뿐입니다. 그들은 각각 현대인의 유형이면서 동시에 작가, 샐러리맨,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맺고, 관계맺어지는 탈구조화된 자아들입니다. 그들은 글을 쓰는 대신 무언으로 함구하며 해체된 내러티브 속에서 각각 따로따로 사고합니다. 분리된 플롯은 때에 따라 하나로 합쳐지기도 하지만 그들의 사고는 절대 합치되는 일이 없습니다.
또한 그들의 관계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영화는 '어긋나기'라는 주명제에 절대 어긋나지 않게 다가섭니다. 전반부에 엘리베이터에서 스쳐지나가는 효섭과 동우를 비롯하여 그들에게 주입되는 것은 각자 인물들의 관계가 어긋나게 되는 것에 국한되고, 결국에는 서로 오해와 불신, 배반과 과욕을 거듭한 채 비극적 결말로 유도해 버립니다.
위와같은 장치와 함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간간히 등장하는 조용한 명상과도 같은 의미없는 쇼트들에 속해 있습니다. 커피샵에서 빠져나와 화분 속의 벌레를 바라보는 효섭의 시선이라든가, 버스 안에서 잠든 동우, 버스를 기다리는 보경을 잡아낸 쇼트 등이 그것인데 이것은 관객을 침묵의 시선 속으로 가두어두며 영화와 관객과의 거리를 조절하는 데에 기여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요 모티프 중에는 '반복'의 개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인의 삶을 표현하는 데에 주요 역할을 합니다. 동우는 지방으로 내려와 계속해서 사장을 찾아다니며 보경은 반복해서 어디론가 떠납니다. 민재는 연일 한 남자의 시선을 느끼면서 반대로 효섭에게 모닝콜을 해주며 그를 계속 갈구합니다. 특히 이러한 삼각관계는 이 반복의 모티프 중 전형적인 것입니다. 동우의 아내인 보경은 효섭의 애인이며 민재는 효섭을 사랑하지만 다른 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또다른 삼각관계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삼각형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밖에 이 반복의 모티프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민재가 아르바이트를 위해 찾아간 전자오락기의 음성을 녹음하는 부분과 보경의 아파트에서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민재는 반복해서 전자오락기에 대고 같은 말을 외치며 보경은 하루하루의 편린들인 신문을 한장씩 한장씩 바닥에 펼쳐놓습니다. 그러한 상징들은 반복의 미로 속에 갇혀 있는, 혹은 밟혀 있는 우리네 삶 같기도 합니다.
관계의 유형을 탐구하는 과정의 내리막길에서 서로의 시선 속에 점철되는 최후는 결국 그들의 서로의 관계에 의한 죽음입니다. 극중에서 일탈을 추구하는 이들의 일탈의 극치를 드러내준 피로물든 이 장면은 보경의 꿈 속에서의 해후와 함께 대비되는 전체적 구도의 관련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즉자적으로 만나고 일장춘몽처럼 사라지는 실용성과 일회성을 표현하기 위한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하나,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이 영화에 있어 너무나도 작위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듭니다.
많지 않은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점에서 영화의 기술적인 면을 따지려든다는 것은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군데군데 드러나는 실수 - 붐마이크가 화면에 비친다든지 사운드의 미비함이라든지 - 는 영화의 사실주의 - 이것도 리얼리즘에 속할 수 있다면 - 를 극대화하는 데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는 이유로 충분히 용서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리얼리즘으로 치장되어 있는 이 영화는 성찰이 배제된 리얼리즘은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다소 과부하적인 측면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 주축으로써 네 등장인물의 언밸런스함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으로 지목될 만합니다. 사실 보경과 효섭을 제외한 나머지 두 인물은 성격파악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며 특히 민재의 경우에는 나머지 세 인물을 따라잡기에 조차 버거운, 미흡한 캐릭터 설정의 경우입니다. 이렇게 제대로 구성되기 전의 오용된 남발은 다소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낯선 여름]처럼 낯설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이러한 일상 속을 빠져나와 일탈의 미로 속을 헤매입니다. 각각의 인물을 연기한 배우들 - 대부분 신인들이지만 - 의 연기는 특별히 훌륭한 점은 없지만 그다지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시나리오는 독창적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힘이 부족합니다. 그래도 제법 다행인지 이 영화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의 그 실망감은 깨끗이 씻어줄 수 있는 괜찮은 영화가 탄생하였습니다. 전반적으로 깔끔한 터치와 단편적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다면적인 틀로 배치한 흔적, 처음부터 끝까지 감각과 주관을 잃지 않는 힘, 경이로운 리얼리즘 등 분명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한국영화의 색다른 세계를 열었고, 그것은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흐름을 창출하여 이제 본격적으로 또다른 방향을 만들고, 또 그 길로 꾸준히 흘러갈 수 있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BLOG: rayspace.tistory.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