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치하의 중국에서 활동한 아나키스트들이라... 참 구미가 당기는 소재다. 돈도 많이 들여 해외 로케를 했으니 볼거리도 풍부할 것이고. 사실 우리 영화 중에 이 정도 스케일을 보여주는 영화도 없으니까.
이런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 조금은 접어 두는 것이 좋다. 흥행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는지 영화는 이념 대결을 펼치다가도 액션씬이 끼어 들고, 간간이 나오는 어설픈 로맨스에 유머까지 곁들인 잡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함께 모인 5명의 사내들에겐 '아나키스트'란 이름에 걸맞는 대의 명분이 적절하게 따라 붙어 주질 않는다. 출신 성분이나 이념적 기초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는 고리는 의열단밖에 없는 것 같다. 김원봉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이끄는 이 단체조차도 산발적인 테러에서 사회주의 봉기로 방향 전환해 버리고 나면 이들을 묶는건 얄팍한 의리 정도? 이들이 아나키스트를 자처했던 건 혹시 영화를 보러간 우리처럼 막연히 그 이름에 끌렸기 때문이 아닐까.
세르게이(장동건)-가네코(예지원)-이근(정준호), 상구(김인권)-링링의 관계는 너무 전형적이어서 고리타분하거나 어설픈 감정 교환으로 비교적 잘 나가던 영화를 걸려 넘어지게 만든다.(이럴 거면 차라리 넣지 말지...) 또한 의열단에서 떨어져 나온 이후에 등장하는 유머러스한 장면들은 전체적인 흐름과는 동떨어져 있어 웃어야 할지를 망설이게 만든다. 사실 웃기는 건 돌석(이범수)이라는 캐릭터 하나로 족했다. 그나마 높이 평가해 줄만한 부분은 비장미가 넘쳐나는 액션씬들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들이 많지만 이 정도의 카메라 각도와 편집 타이밍이라면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특히 마지막 시퀀스는 근래에 보기 드문 명장면으로 아나키스트들의 비극적 운명을 시사하기 까지 한다.
주연급들의 연기는 그동안 그들이 쌓아 올린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그대로 담아 냈다는 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김인권의 캐스팅은 여러모로 적절하지 못했다. <송어>에서도 그랬듯이 그의 연기는 연기자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부족한 점이 많다. 어딘가 경직되고 쫄아 있는 모습이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가 맡은 내레이션은 늙수그레한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인지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이범수는 자신이 가진 개성을 한층 업그레이드시켜 묘한 카리스마까지 뿜어낼 정도로 좋았다.
약간의 오버도 불사하는 이 배우의 코믹 또는 비장한 연기는 연기에 임하는 그의 성실한 자세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이상하고 어설픈 장르 혼용은 한국 상업 영화의 결정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액션이라면 화끈하고 냉정하게 밀어붙이던가, 아나키스트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하고 싶었다면 그런 쪽의 에피소드들과 함께 치열한 이념 대립을 준비했어야 할 것이다. 넘어야 할 산이 여럿이라면 괜히 이곳저곳 산기슭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보다 한두 개만 제대로 넘어도 된다. 관객들은 어울리지 않는 해물 잡탕보다 맛있는 광어회 한 접시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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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The Arnachists :::
세르게이(
약간의 오버도 불사하는 이 배우의 코믹 또는 비장한 연기는 연기에 임하는 그의 성실한 자세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