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작> 내게도 사랑이

리뷰

<불후의 명작> 내게도 사랑이 :::

윤상열 | 2000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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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영화 속에서 인기(박중훈)를 보다가 눈물이 흐르는지 모르겠다. 단지 애로라는 이유와 3류라는 이유로 기존 영화계에서 자기 밥그릇을 찾지 못하고 떠돌이 유랑극단 신세가 되버리고, 그래서 너무나 측은해서 그랬던 것일까? 아직 그에게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는데도 말이지.

영화 <분노의 주먹> 의 오프닝을 그대로 따 온 듯한 첫 장면부터 관객은 까발레리아 루스띠까나의 장중함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커스 곡예의 시범단계 정도로 보아 넘기면 될 것이고, 웃기는 건 너저분하게 이어지는 성인영화 촬영장면이다. 어디서 컷 사인을 내려야 하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는 그 바닥(!)의 속성이 그러한 것인지 감독 인기는 얘기에 정신이 팔려 컷을 부르는 순간조차 잊어버리고 있다. 무시하면 무시할수록 사나워지고 비밀스러워지는 것이 무시당하는 쪽의 습성이 아니던가 그걸 잊고서는 성인영화 감독도 제대로 해먹기 힘들다는 것을 왜들 모른단 말인가. 인기는 아직도 빛에 쪼들리고 사는 충무로의 빛과 그림자를 상징한다고 봐도 무관할 정도다. 이것은 감독 자신이 그러한 생활을 유사하게 겪어서 그런지 억지로 꾸며 놓은 인공적인 느낌은 웬만큼 배제된 것 같다. 신인 감독의 연출력이라면 별점을 요란하게 메기지 않아도 자신 자신의 경험이 투영된 시나리오만큼 사실적인 것이 또 있겠나 싶지만 아직 요리조리 둘러볼 곳이 넘쳐나는 영화다.

인기는 여경(송윤아)을 선배 명준(황인성)에게서 소개받는다. 글 실력이 없는 자신의 능력 탓에 시나리오를 같이 집필해 줄 사람으로서, 하지만 그것이 명준에게서 버림받은 여경을 위탁받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인기는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무나 단순해서 모른다. 아니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은 발 끝 도움닫기의 거리 정도의 남녀의 과거라고 해석해야 할 그들의 공통된 아픈 상처다. 하지만 인기는 운명적인 만남으로 여경과의 첫 미팅을 시작한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인생의 '불후의 명작'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만들어가야 할 내 인생의 최고의 영화로 당신(여경)을 선택한 기적 같은 순간을 기록할 일만 남았다고 여기기에 한없이 좋은 시절인 까닭이다.

영화는 <박봉곤 가출사건> 의 또 다른 변종 마냥 그 사이를 기웃거린다. 물론 그 안에 내재된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다른 사건과 인물들뿐이다.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는 매우 소박한 모양새를 띄우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톤의 무게는 몽환적이고 가벼움의 깃털을 단 듯이 부드럽다. 어디론가 날아갈 듯 하면서도 잡혀지지도 않는 반딧불의 출현처럼 보는 이를 설레게 만든다. 그것이 이 영화가 지니는 사랑스러움인 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이명세 감독 특유의 농염한 화면 안에서 깨끗하게 정제된 순간들만 포착한 것 같은 단조로움이 영화의 리듬감을 살려 주는데 큰 몫을 담당했던 것 같다. 충북 괴산의 냇가에서 이루어지는 아마폴라의 어색한 춤이 평범하지만 화려하게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영화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순간이 있다. 인기의 안내로 찾아 간 빈 서커스 공연장에서 여경이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그려내는 환상적인 풍경화가 그것인데, 300여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된 대규모 셋트와 동춘서커스단과 중국교예단이 참여한 화려한 볼거리로 치장한 서커스까지 고작 10여분의 불과한 이 장면이 압권을 이루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무작정 볼거리로만 간주해서 이 장면을 흘겨 넘겨 버리면 그만일 테지만 이야기 구조 안에서도 그 장면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바로 인기와 여경이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자신들만의 사랑이야기를 서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키워가는 보금자리로서 꾸며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 안에서, 영화를 그리며, 영화 같은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화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바쳐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정한 바램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자신의 마스터피스가 될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것이니 말이다. 혹시나 의심스럽다면 당신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번 시험해봐도 무방할 테지만 말이다. 그 만큼 이 영화 속의 영화는 너그럽고 다정다감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현실을 착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영화는 항상 그랬지만 디지털이라고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불후의 명작>은 심광진 감독의 인터뷰 "억지로 꾸민 예쁜영화 지양할 터"이라는 말 그대로 결코 아기자기하며 예쁘게 꾸며진 영화는 아니다. 관객 역시 조급하게 그러한 구석을 찾아 헤매고 다닐 필요도 없다. 그들은 이젠 당신들 앞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펼쳐 보일 예정이기 때문이다. 좌절하지 말라고 삶에 지친 우리들을 유쾌하게 다독거려 주면서 말이다. 명랑하게 보일 때까지 서로를 감싸주는 애정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